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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문 글지기 Sep 02. 2023

가장 왕성할 때 내년을 준비한다

9월의 목련 꽃망울을 보면서

사무실 앞에서 서성이다가 문득 목련나무를 쳐다보았다. 매서운 추위가 막 지나고, 햇빛의 따사로움이 느껴지는 순간에 보이는 꽃 중의 하나가 목련이다. 나뭇잎도 없는 가지에서 꽃만 화사하게 피우며 봄을 맞는다. 그래서인지 목련을 담은 시와 노래가 무척 많다. 


9월의 첫날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햇살이 따가운 시기여서, 목련의 잎은 여전히 짙푸른 기운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보니 나뭇잎 사이로 꽃망울이 보였다. 부지런한 나무는 힘든 여름을 보내면서 벌써 내년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사람들은 추은 겨울 동안 웅크리고 있다가 날씨가 풀리면 나무들을 쳐다보면서 ‘저 나무들은 이 추위를 뚫고 어떻게 저런 꽃망울을 만들었을까’ 하면서 놀라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다. 나무도 추위 속에서는 조용히 기다릴 뿐이고, 꽃망울은 이렇게 그 전해 여름이 가기 전에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이다. 


목련의 잎은 크고 많아서 여름에는 좋은 그늘을 만들어 준다. 그리고 잎이 두꺼워서 나뭇잎 공예를 하는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재료이기도 하다. 밋밋한 나뭇잎 모양이지만 그 속에 솜씨를 발휘하여 공예가들이 새겨놓은 그림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여름에 목련나무를 그늘 외의 목적으로는 거의 찾지 않다가 이렇게 꽃망울을 보니 자연의 지혜를 새삼 깨닫게 된다. 후손을 이어가기 위하여 식물은 이렇게 가장 왕성한 시기에 다음 해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준비된 나무는 봄을 알리며 부지런히 꽃을 피우고, 이런 꽃을 사랑하는 인간은 이 나무를 여러 곳에 심는다. 결국 식물의 준비하는 지혜로 자손을 번성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식물과 다르다. 매년 봄을 다시 맞는 것이 아니라 인생전체가 하나의 큰 사계절이라 할 수 있고, 그 계절은 한 번뿐이다. 나무는 한 해의 어느 계절을 잘 못 보내더라도 다음 해를 기약할 수 있다. 사람은 그럴 수 없다. 한 번 간 계절은 다시 오지 않는다.


나는 어느 계절에 서 있는가. 분명 가장 왕성한 계절은 아니다. 내리막으로 가는 길목 또는 과정 어딘가에서 가는 세월을 아쉬워하고 있다. 그러면서 목련의 꽃망울을 보면서도 그 준비성과 지혜를 미리 깨닫지 못했던 것을 되돌아 후회하고 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지만 모든 면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식물의 이 작은 지혜도 앞지르지 못하면서 스스로를 그렇게 칭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그 이유는 가장 왕성한 시기에 기울어져가는 계절을 미리 준비하지 못했다는 회한의 다른 표현이다.


60세를 전후하여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 사람 중에 자기 힘만으로 노년에 대한 준비가 끝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앞서간 선배들은 주된 직업에서 퇴직하기 전에 다음을 준비해 두라고 하지만, 대부분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지 못하거나 자기 일은 아니라고 여긴다. 


나도 그렇고, 그래서 지금도 새로운 준비로 바쁘다. 4개월의 준비 끝에 새로운 길에 보탬에 될 수 있는 국가고시 자격증 하나를 취득했다. 소위 말하는 ‘동차’ 합격을 하여 무척 기쁘기는 한데, 이제야 이런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회한이 없을 수는 없다.


조금 더 일찍 이런 준비의 필요성을 알았더라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불필요한 가정도 해본다. 하지만 왕성한 시기에는 항상 이럴 것이라는 근거 없는 망상만 가졌을 뿐 실제적인 준비는 하지 못했다. 그나마 지금도 도전하는 기회는 있고, 작은 성취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은 큰 다행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이 지혜와 경험이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처럼 문명의 발달이 빠른 시기에는 맞지 않는 말이다. 젊은이들은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젊은이들에게 배워야 그나마 시대에 너무 뒤떨어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최근의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세계에서는 특히 그렇다.


목련의 꽃망울을 보면서 후배들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지금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선배가 미래 자신의 모습이 되지 않게 하려면 저 식물의 지혜를 배우라고. 왕성한 시기에 준비해야 후회 없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인생의 황금기를 더 길게 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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