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와 여행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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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는 어떻게 그랬을까.
작은 것들을 어떻게 그렇게 소중히 여길 수 있었을까.
맨손으로 태어나 가진 게 없어서 그럴 수 있었을까.
어린 날 나는 시골 친척집에서 벌목을 할 때 가져온 나무토막과 바닷가에서 주워 온 돌멩이를
'보물 서랍'에 넣어 두고 소중히 여겼었다.
나무토막과 돌멩이가 성인의 시각에서 보물 서랍에 들어갈 만한 물건인가를 논하자면
아닌 쪽에 더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럴 수 있었다.
열일곱에 카페에서 파는 조각 케이크를 처음 먹어 보았다.
내가 받는 용돈으로는 조각 케이크가 비싼 편이었고,
나는 늘 조각 케잌을 실컷 먹는 미래를 꿈꾸었다.
스무 살, 대학에 입학하고 친구와 투썸 플레이스 조각 케이크 다섯 개를 한 번에 시켜서
앉은자리에서 다 먹었었다. 나와 친구는 행복에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이제는 케잌을 다섯 개씩이나 시키지 않는다. 조각 케잌 앞에서 그때와 같은 설레임을 느낄 수도
없다. 하지만 그때는 그럴 수 있었다.
자연계의 엔트로피 변화는 항상 증가하는 방향으로 일어난다.
그건 내 안에서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경험한 나는 경험하기 이전의 나로 결코 돌아갈 수가 없다.
경험은 사람을 지혜롭게 만들고 노련하게 만들며 성숙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사람을 무디게 만든다.
그 때와 같은 날것의 시각을 다시 갖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늘 무엇을 가져 본 적 없는, 조각 케이크를 맛본 적 없는 시각으로 바라본 세상을 그리워한다.
타지에 도착하는 일은 꼭 탄생과 닮아 있지 않은가.
비행기가 지상으로 내려오고 나를 땅에 내려놓으면, 그러면 난
내가 모르는 언어를 쓰는, 나와 닮아 있지 않은 사람들로 가득 찬 낯선 곳에 뚝 떨어진다.
1990년대 한 산부인과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어머니가 갑자기 낯선 땅에 나를 뚝 떨어뜨려 놓았고, 나는 모르는 생물들에게 둘러싸였다.
모르는 생물들은 내가 모르는 말을 했다.
나는 자라면서 모르는 생물들이 사람임을 알게 되었고 모르는 말이 한국어임을 알게 되었고
또 다른 것들도 알게 되었지만 알기 전의 시각에 대해서는 모르게 되었다.
그리고 몰랐을 때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래서 여행을 떠난다. 처음 땅 위에 섰을 때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어서.
완전한 타지가 주는 짜릿함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무엇도 가지지 않아 무엇도 책임 질 필요 없는 상태로 세상을 그저 유희의 터로 여겨 보고 싶어서!
여행하는 동안은 무지해도 된다.
약속된 시한부의 무지를 즐겨도 된다. (예산과 잔액에 대해서는 알아야겠지만 논외로 한다.)
한국에서의 관계와 책임과 삶과 숫자는 한국에서의 것이고,
여기 있는 나는 처음 보는 사람과 풍경과 건물과 음식을
세상에 처음 났을 때의 눈으로 바라보며 사랑하면 된다.
그래, 그러고 싶어서 떠난다.
나는 모르고 싶고 아이이고 싶고 순수하고 싶고 사랑하고 싶어서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