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들은 생각지도 못한 계기로 삶 속으로 들어온다.
시작은 2020년 1월이었다.
나는 건강한 식생활에 관심이 많은 자취 육 년 차였고, 어느 날 인터넷에서 양배추 스튜라는 음식을 접했다. 위장에 좋은 음식인 양배추를 각종 야채와 소시지와 함께 끓여 맛있게 먹을 수 있다니! 게다가 그때는 계절도 겨울이라 따뜻한 국물 요리를 먹기 딱 알맞을 때였다. 그래서 그 시즌에 나는 내 주식을 그 스튜로 정해 놓고, 외식 약속이 없는 날이면 집에서 열심히 그 스튜를 끓여 먹었다. 친구가 집에 놀러 와서 내 옆에서 마라탕을 먹어도, 나는 건강을 향한 일념으로 꿋꿋이 야채 스튜를 먹었다.
그 스튜에 들어갔던 재료 중 하나가 당근이었다. 나는 야채 스튜를 열심히 끓여 먹었지만 아쉽게도 당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근은 거의 향신료라고 할 수 있을 만큼만 스튜에 넣었다.
그 결과 스튜를 위해 구매한 다른 모든 재료가 소진된 뒤에도 당근의 반 토막, 머리 부분을 포함한 작은 토막 하나는 내 냉장고 안에 남게 되었다.
그 뒤에는 좀처럼 그 당근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학교생활을 위해 타지에서 자취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전면 비대면 강의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굳이 그 집에 있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그 당근 한 토막을 두고 본가로 올라와 버렸다.
아니, 두고 왔다는 표현을 가져다 붙이기에도 미안하다.
나는 그 당근에 대해서는 조금도 염려하고 있지 않았으며, 그런 것이 내 집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그냥 그건 무(無) 였다.
드디어 나는 그 당근을 ‘인식’ 하게 되었다.
6월, 친구와 함께 놀 겸 해서 자취방에 오랜만에 내려갔고,
6월 6일 밤에 냉장고에서 그 오래된 당근을 발견했다.
나는 투명한 비닐 봉지에 싸인 당근 토막을 바라보며 계획을 세웠다.
저 당근은 썩었을 것이며, 썩음을 넘어서 문드러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날이 밝으면 저 봉투 째로 내다 버리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러나 조심스러운 손길로 당근이 든 봉투를 들어 올려 안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 눈에 들어온 건 썩어 문드러진 곰팡이가 아니라 노란 새싹이었다.
엽록소가 합성되지 않아 완전한 노란색을 띠고 있는 게 좀 신경이 쓰였다.
춥고 빛도 없는 곳에서 너는 자랐구나.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하지만 감상은 감상이고 계획은 계획이다.
나는 당근을 봉투째로 내버리는 일을 내일로 미루고 침대에 누웠다.
잠이 들기 전에 잠깐은 당근 생각을 했다.
토막난 당근 하나를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리는 건 쉽지만
싹이 난 생명을 음식 쓰레기로 버리는 건 왠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느지막히 일어나서 당근을 보았다.
빛이 잘 드는 곳에 두지도 않았는데, 그 조금의 빛도 빛이라고
잎이 살짝 연둣빛으로 변해 있었다.
나 자는 사이에 넌 엽록소를 만들었구나. 너는 진짜로 살아 있구나!
아, 나는 더 이상 그 당근을, 그 생명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당근을 다듬어서 작은 그릇 안에 담아 햇빛이 잘 드는 곳에 두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친구를 당순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친구는 근근이라는 이름을 추천했다.
냉장고에서 근근이 살아남은 당근이라는 의미를 담은 작명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람의 운명은 이름을 따라간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하는 이 세상에서
저 당근에 근근이라는 이름을 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근근이를 반대했다.
지금까지 오 개월을 춥고 어두운 곳에서 살았는데 이제는
근근이가 아니라 행복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는 우리 집에서 가장 빛이 잘 드는 화장실 창틀에 당순이를 놓고 매일매일 당순이를 본다.
어떤 소중한 것들은 생각지도 못한 계기로 내 세상 안으로 들어온다.
오 개월 동안 있는지도 몰랐던 야채 스튜 재료가
매일 아침 인사를 나누는 친구가 되다니
삶이란 알 수 없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음이 가끔은 나를 괴롭게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재미있는 일도 일어나는구나.
어차피 알 수 없는 거, 알 수 없음을 즐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