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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유니 Jun 22. 2020

물 1.5리터로 머리 감기

하면 된다는 말, 어느 정도는 맞는 것 같아





비가 오던 어느 날.

사건의 발단은 오래 써서 헐거워진 욕조 하수구 마개였다.

단수를 대비하기 위해 한가득 받아 둔 물은 하수구 너머로 천천히, 확실히, 전부 사라져 버렸다.



프롤로그 


밖은 비가 온다.

어제 늦은 밤부터 시작된 비가 그치지 않는다.

그래서 온 세상이 물이지만, 여기는 아니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오늘 아침 11시~밤 11시, 12시간 동안 단수이다.


아침에 집에서 가장 일찍 일어나는 사람은 출근하는 어머니다.

나와 남동생은 자고 있었고, 어머니는 집을 지킬 남매를 위해 욕조 가득 물을 받고 출근하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눈치채지 못하셨다!

욕조 배수구 마개가 헐거워져서 받아 둔 물이 천천히 사라지고 있음을.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등교하지 않게 되어 게을러진

대학생 남매의 하루는 오후에야 시작되었고,

그때는 이미 욕조에 받아 둔 모든 물이 사라진 뒤였다.

아비규환이다.


남은 물: 8.1 리터

<브리타 정수기 물 1.5리터, 유리병의 물 1.8리터, 정수기 포트 안의 물 약 800밀리, 스테인리스 볼 안의 물 약 2리터, 작은 세숫대야 안의 물 약 2리터.>



동생은 새벽에 매일 헬스를 다녀온 뒤 다시 자고 늦게 일어난다.

그래서 어머니 출근 이후 먼저 일어난 것은 나였다.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한 것은 당황이었다.

아니, 욕조에 물이 왜 하나도 없는 거야.

그러나 당황은 당황이고 나는 강의를 들어야 했기에

일단 비대면 강의를 틀었고, 수업을 들으며 약 500밀리리터의 물을 마셨다.

그리고 나서 점심으로 무얼 먹을까 고민을 하다가 비빔면을 끓여 먹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물 육백 밀리리터를 썼다.


그런데 아뿔싸, 바보 같은 나는 비빔면이 다 끓고 나서야 깨달았다.

비빔면은 조리 후반에 찬물로 헹구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음식이라는 것을!

왜 나는 조금 더 지혜롭지 못했을까.

나는 스테인리스 볼의 물 2리터를 비빔면 면발을 식히는 데 사용했다.

물 2리터는 -그렇게 시원한 편도 아니었다-  비빔면을 식히는 데 택도 없는 양이었고, 면발은 완전하게

시원해지지 못했다.

그래도 상관없다.

귀한 물을 2리터나 써 버린 것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나는 미지근한 비빔면을 먹었다.

그리고 이를 닦고 손을 씻는 데 물 1.5 리터를 사용했다. 생각보다 물을 많이 쓴 이유는 한 손으로 물바가지를 섬세하게 컨트롤하며 물을 따라 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손을 씻으며, 비눗기를 가시게 하는 데 생각보다 많은 물이

들어간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남은 물: 3.5 리터

<브리타 정수기 물 1.0리터, 유리병의 물 1.8리터, 정수기 포트 안의 물 약 200밀리, 작은 세숫대야 안의 물 약 500밀리리터.>


동생은 오후가 지나서야 일어났다. 늦게 일어난 동생에겐 미안하지만 물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동생은 너구리를 끓여 먹으며 포트 안의 물과 유리병의 물을 사용했다. 그리고 물을 마시며 목도 축였다.

나 또한 가끔 물을 마셨다. 마시는 것이 아니라 목을 적신다고 생각하며 마셨다.

영화 터널에서 하정우가 페트병에 있는 물을 아껴서 마시는 장면이 생각났다.


비 내리는 세상은 온통 물인데, 내가 쓸 물만 없다.

비는 아직도 내리고 밖은 온통 물이다.

세상에 이렇게 물이 많은데, 내가 쓰고 마실 물이 없다.
창밖으로 대야를 내밀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인류 중의 내가 아닌 한 생명체로서의  나는 얼마나 나약한가!

2020년의 인간은 이제 정말로 군체 같다. 인류 문명이 발달하며 군체가 된 것인지, 군체가 되었기 때문에

문명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인지 모호하다. 닭과 달걀 같다는 생각을 한다.

고작 수도 시설을 쓰지 못할 뿐인데, 남매의 일상은 무인도에서 살아남기와 비슷하게 되었다.


90년대생이라면 이 책이 익숙할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 이걸 읽으며 서바이벌/생존 상황에 대한 흥미를 느꼈었다.



남은 물: 1.7 리터

<유리병의 물 1.5리터, 작은 세숫대야 안의 물 200밀리리터>


이제 남은 물은 약 1.7리터, 문제가 시작되었다.

동생이 오후 여섯 시에 아르바이트를 위해 집을 나서야 하는데,

머리가 까치집이었던 것이다.

용모 단정이란 아르바이트생에게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가. 따라서 그 까치집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동생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렸지만 물을 빌릴 집을 찾지 못했고,

고민 끝에 물 1.5리터로 까치집 머리와 담판을 짓기로 결정했다.


물 1.5리터로 머리를 감는 데는 물을 아주 조금씩, 균일하게 흘리는 기술이 요구된다.

한 사람이 머리를 헹구어 거품을 씻어내는 동시에 구사하기는 힘든 기술이기 때문에,

내가 서포트로 동원되었다.

나는 아주 천천히 물병을 기울여 동생의 머리에 물을 부어 주었다.

동생은 야무진 손길로 비누를 씻어 냈다.

우리는 아포칼립스에 대비하는 연습을 하는 기분이라며 웃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비눗기가 다 씻겨 나갔다.

완벽하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손으로 머리를 짰을 때 비눗기가 묻어나는 정도는 아니었다.

심지어 물은 약간 남기까지 했다.

동생은 남은 물로 세수까지 성공했다.

곧이어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옷을 입은 동생은 아주 말짱하다.

와, 진짜 못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니까 되는구나. 이게 되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온 물 세 병

동생이 쓴 물은 우리 집안의 마지막 물이었고, 내가 마실 물과, 퇴근한 어머니가 손을 씻을 물이 없었다.

그래서 동생은 출근 전에 2리터 물 세 병을 사서 엘리베이터로 올려보냈고,

내가 그 물을 픽업했다. 이게 웬 재미있는 작전 같은 상황이란 말인가.

엘리베이터에 덩그러니 올라온 물을 보며 , 혼자 웃었다.


올려 보내준 6리터의 물이 무색하게도  어머니가 퇴근하고 얼마 되지 않아 단수는 풀렸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겪은 단수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단수가 될 것 같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말을 또 한번 뼈저리게 실감했고,

마음을 독하게 먹으면 안 될 일도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언제 또 이런 재미난 경험을 해 보겠는가.

언젠가 동생이 힘들어하는 날에, 거품 가득한 머리 위로 물을 쫄쫄 흘리던 오늘을 이야기해 줄 거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거다.

“물 1.5리터로 머리도 감은 너인데 이깟 일이 무슨 대수겠어!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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