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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유니 Dec 16. 2020

부자유

어느 가을날의 실존에 관한 단상


가을의 땅은 바스락거리는 피부를 가졌다.

어느 가을, 나는 꺾인 억새밭 위에 드러누워 구름이 없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니트 아래로 마른 풀들이 등을 찌른다.

너나 나나 사실 별로 다를 게 없는데 말이야, 어떻게 이렇게 다르게 살게 되었을까.

뿌리를 땅에 내리고 조용한 건 풀들이지만

그들보다 내가 더 부자유스럽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피부가 마른 풀에 닿는 걸 아파할 정도로 나약하기까지 해.


나는 건강한 다리를 두 개 가졌다.

그러니 발 닿는 대로 걸음을 옮길 수 있을 줄로 알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속옷과 신발과 양말과 겉옷과 기온에 따라서 또 다른 겉옷이 필요하다.

주머니에 휴대폰과 이어폰을 단단히 넣고도,

안경과 렌즈 통과 노트북과 아이패드와 수첩과 볼펜과 지갑을 넣은 백팩을 메야 한다.

게다가 내겐 뿌리와 엽록소가 없어서

물병과 도시락과 영양제가 필요하고

또는 그것들과 맞바꿀 액수의 현금이나 계좌나 그것과 연동된 플라스틱 조각이 필요하다.


전에 2주 동안 멀리로 여행을 떠났었다.

언제든 내가 사람이며 한국인이고 여성이며 전유니이자 구십년대에 태어났음을 증명해야 했기 때문에,

여행 내내 그 모든 말을 대신해 줄 칩이 들어간 수첩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또한 나는 디지털 파일을 팔아 돈을 만들기에,

살기 위해선 전기가 꼭 필요하다.

두 다리를 가졌어도 돌아다닐 수 있는 범위는 콘센트로 전기가 보급되는 범위나 다름없다.

캐리어에 꼼꼼히 챙겨 온 휴대폰 충전기와 노트북 충전기와 카메라 배터리 충전기를 보는데

전선들이 핏줄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페이스 그레이 색 쇳덩어리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줄 두껍고 하얀 동맥들.


이제 우리 종은 물질대사와 생식이 삶의 전부가 아니게 되었고

세상에서의 나의 위치를 설명할 -변호할 - 단어 또한 늘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뭐 하시는 분이에요?

아 제가 뭘 하는 사람이냐면요,

숱하게 펼쳐지는 대화들.


사람으로 산다는 건 정말로 자유로운 걸까.

건강한 몸과 정신 말고도,

수많은 부가적인 것들이 모여야 비로소 내가 된다.

나는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삶을 애정한다.

그러나 가끔은 갑갑함에 견딜 수 없게 진절머리가 나서,

글을 토하게 되는 날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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