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보다는 기록을 믿기로 했다.
공부는 잘하지 못했으나
어렸을 적부터 기억력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다.
물론 내가 흥미 있는 분야와
잊지 못할 추억, 친구에 대해 한정해서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프로야구 타격 10위,
방어율 10위 안에 드는 선수들의 이름은
다 외우고 다녔고 연도별 우승팀은 줄줄이 말할 수 있었다.
성인이 되어 만난 중, 고등학교 친구들과의
기억도 어제 일처럼 술술 꺼내놓는다.
주변 사람들은 나의 기억력을 부러워했고,
나 또한 내 기억력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덕분에 군대에서도 선임들의 이름과
내선 전화번호를 빨리 외워 이쁨도 받았고
사회 생활 하면서는 상대방이 한번 말한 취향은
결코 잊는 법 없이 맞춰줬다.
그런 나를 보고 한 선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부럽다, 나는 기억력이 딸려서 늘 메모하거든"
생각해 보니 그 선배는 스마트폰 메모장도 쓰지 않는,
순수 정통 메모 파였다.
회사 사람들과의 대화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가족들과의 대화도 메모한다고 했다.
선배의 이직으로 한동안은 만나지 못하다가 몇 년 전에 같이 식사를 했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여전히 손바닥 만한 크기의 수첩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일했을 때의 추억들을 곱씹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눴다.
그러던 중 어떤 일화를 이야기하는데
굉장히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참 신기했다.
그 사건은 나에게도 흔치 않았던 일이라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선배는 매우 세세하게 말하고 있었다.
각자 헤어지고 집으로 오는 길,
나는 생각에 잠겼다.
'기억력 좋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고 심지어 일기도 쓰는데
왜 저 사람보다 세밀하게 그리지 못한 걸까'
나의 뇌는 알게 모르게 자존심이 상했는지
잠자리에 누워서도 그 생각을 이어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던 고민은
기록의 차이라는 답으로 결론지어졌다.
하루의 일을 마무리하는 밤 10시에 일기를 쓰던 나와
매 순간을 실시간으로 기록하는 선배,
질적인 차이가 당연히 날수밖에 없는 일이다.
하루사이에 있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뇌는
아침에 있었던 일을 저녁에는 교묘하게 왜곡시킨다.(고의는 아니지만)
그리고 그 왜곡된 기억을 진실로 믿고 기록을 한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바로바로 기록해 아는 사람과
정제된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은
시간이 흐르면 더 큰 차이를 나타낸다.
이와 더불어 나 또한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예전만큼 기억력이 명쾌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지한다.
받아들이기 싫지만 어쩌겠는가, 자연의 섭리인 것을.
그래서 몇 년 전부터는 나도 실시간으로 기록한다.
그 선배처럼 수첩에다 손으로 필기하는 정도의 정성은 아니고
스마트폰의 메모장으로 기록하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도움이 된다.
주변 사람들이 "안 그래도 기억력 좋은 놈이 기록까지 하네" 라며
건네는 칭찬도 기분이 좋다.
앞으로 내 기억력은 조금씩 퇴화될 것이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지난 몇 년간 철저히 습관화된 나의 기록력이 있으니.
내가 기록한 메모, 그것을 바탕으로 쓴 일기는
그 어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만의 실록이며 그 어떤 사람의
기억에 뒤지지 않는 신뢰도를 갖는다.
계속해서 나는 나의 기억력 보다 기록력을
믿으며 살 것이고 매일매일 써 내려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