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하면서도 낯설었던 나의 혜화동

by 레지널드

얼마 전 연극을 보기 위해 대학로에 갔다.

결혼한 지금은 생활반경이 다르고

접점이 별로 없어서 갈 일이 없었지만

혜화동과 대학로는 내 20대 무척 비중이 큰 동네였다.


오랜만에 탄 4호선은 전동차가

최신식이라서 놀라웠다.

내가 4호선을 타고 돌아다니던 시절만 해도

1호선 못지않았는데 지금은

그때의 전동차는 뒤안길로 사라진듯했다.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이미 4호선을 타고 가는

내 마음은 설렘으로 가득했나 보다.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혜화역에 도착했고 4번 출구 밖으로 나왔다.

익숙한 건물이 보이면서

추운 날씨 속 훈훈함을 느꼈다.

그런데, 걷다 보니 익숙하지 않은

풍경들이 계속 펼쳐졌다.


10년 전 이곳은

명동이나 강남역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주말이면 늘 인파로 북적였었다.

하나 그날은 토요일 오후였음에도

좀 한산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거닐었는데

그건 내 착각이었나 보다.


곳곳에 임대문의라고 쓰인

종이나 현수막이 걸려있었고

을씨년스럽게 1층이 비어있는 건물이

눈에 종종 띄었다.

사람이 많은 곳은 호떡을 팔고 있는 노점 한 곳뿐이었다.


다행히도 내가 자주 다닌 음식점은

계속 영업 중이라 오랜만에 그곳에 가서 식사를 했다.

외국인 사장님은 예나 지금이나

친절하게 응대를 해주셨으나

텅 비어있는 식당은 나의 마음 한구석을

쓸쓸하게 했다.

우리가 들어왔을 때 식사 중이던 손님들이

식사를 마치고 나가자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사장님은 이 넓은 식당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했다.

돈벌이가 시원치 않은 속상함,

말소리라곤 직원들 간의 대화와

음악이 전부인 그 고독함..


식사를 끝내고 연극을 보기 전

간단하게 커피나 한잔 할 요량으로

다시 이곳저곳을 걸어 다녔다.

내가 자주 다녔던 때만 해도 이곳은

개인이 운영하는 식당과 카페가 참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딜 둘러봐도

간판에 '혜화점', '대학로점'이라고 쓰인

프랜차이즈 가게들의 간판만 즐비했다.

그 많던 자영업자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더 놀라운 사실은 그 프랜차이즈 가게마저도

빈자리가 많았다.

오직 스타벅스 한 곳만이 사람이 넘쳤다.


나는 규모는 크지만 손님은 없었던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연극을 보러 갔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그냥 가기엔 아쉬워서

또 한 번 대학로를 거닐었다.

저녁 8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지만 활기는 없었다.

큰 건물들, 연극의 성지임을 알려주는

소극장 간판과 팸플릿, 거리에 설치된 조형물들을 빼고

사람들만 놓고 본다면

건대입구 인근보다 적고 군자역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다운로드.jpg 출처: 경향신문

지난 몇 년 사이에 이곳 대학로엔 무슨 일 있었던 걸까.


당장에 지하철 두 정거장만 더 가면 나오는

DDP인근은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심지어는 외국인 관광객들도 넘쳐나는데

이곳은 왜 이렇게 상권이 침울해진 걸까.


혜화역 인근은 크게 성균관대 상권과

대학로 상권으로 나눌 수 있다.

성대 상권(4번 출구 방면)이야 아무래도

학생수가 줄어든 이유도 한몫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럼 이 동네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로 방면(1번 출구 방면)은 왜 그런 걸까 하고

생각해 보니 쉽사리 뭔가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나는 왜 이곳에 오랜만에 왔는가'라고 생각해 봤다.

그렇다, 할게 많아졌다.

그래서 내가 이곳을 찾지 않았다.


내가 20대 중반이던 시절,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엔 OTT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시 피했고

전자책 어플도 지금처럼 활성화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영화관은 사람이 많았고, 연극을 보는 사람도 많았다.

책을 읽기 위해서 카페를 찾는 사람도 많았다.


또한 홍대 인근이 소음으로 인해 민원이

빗발친다는 뉴스를 본 적은 많았지만

대학로가 소음에 몸살을 앓는다는

뉴스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만큼 대학로 하면 홍대와 달리 조용하면서,

사색을 즐길 수 있는

예술의 성지 같은 이미지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젊은 청년들은 할 곳도 갈 곳도 많아졌다.


각 지자체들의 노력 덕분에

서울은 특히나 각 구마다 명소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이 한 군데 이상은 꼭 있다.

굳이 대학로가 아니더라도 즐길거리가 많은 세상이다.


대학로의 심벌이라고 할 수 있는 연극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영화관 시장도

점점 규모가 줄어들고 있는 시국에,

연극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혜화동과 대학로의 정체성은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상권을 다시 부흥하게 하는 건 어렵지 않다.

앞서 말한 대로 지자체가 마음만 먹고

콘셉트 정해서 미친 듯이 홍보하고

화려한 놀거리를 만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사람이 북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 동네의 기본 정체성은 변질되어선 안된다.


대학로와 혜화동을 개발한다면

무조건 그곳의 예술인들을

우선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들은 원래 거기의 주인이며 보호받아야 할

가난한 예술인들이다.


통계마다 정확한 수치는 다르지만

연극배우들의 평균 연봉은 무척 낮다.

가난한 예술인이라 표현한 건 그런 이유에서다.


지갑은 가난하지만 예술에 대한 열정은

큰 사람들이 작은 힘이나마 뭉쳐

무언가를 해보자 모인 곳이 소극장이고

그런 소극장들이 모여 연극의 성지,

대학로가 탄생된 것이다.


혜화동과 대학로의 상권이 부활하되

그들을 밀어내지 않는 방향으로 이루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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