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때였다.
집에 우편물이 날아와서 확인해 보니
주민등록증 발급 신청을 하라고 적혀있었다.
덩치는 컸지만 생각하는 건 아직
애나 다름없었던 철부지답게
마치 어른이라도 된 것처럼 설레었다.
그때는 얼른 어른이 되고 싶어서 그랬나 보다.
인근 스튜디오로 찾아가 당당하게
'주민등록증 사진 찍으러 왔습니다'라고
말하며 사진을 찍던 그날의 광경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히 남는다.
주민센터에 들러 지문도 등록하고,
한 달 뒤 발급받은 주민등록증,
정말 아무것도 아니고 내가 뭘 노력해서
받은 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참 철이 없었다.
그 신분증으로 언제 술 마실 수 있을까
뭐 그런 생각만 했으니.
주민등록증 말고 다른 신분증이 생긴 건
그 후 한참이 지나서 딴 운전면허증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주는 주민등록증 말고
이건 내가 노력해서 얻은 신분증이라
기분이 정말 좋았다.
그 후로 몇 년 뒤에는 여권을 발급받았다.
이젠 국제적으로 나를 증명할 무언가가 생긴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해외여행을 자주 다녔던
친구들이 부러웠는데 드디어
나도 해외로 나갈 수 있는 자격이 생긴 게 기분 좋았다.
나뿐만 아니라 사람들 모두
신분증을 발급받았을 때
기분 좋았던 적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 신분증이 생기면
그걸 무척이나 소홀하게 여긴다.
오히려 그 신분증 보다
신분증 사진을 더 소중히 여긴다.
IT 강국답게 우리나라는
모바일 신분증 제도도 잘 정착되고 있고
앞으로 시대의 흐름상 최첨단의 기술력이
동원된 신분증이 계속해서 등장할 텐데
그럼에도 나는 '실물 신분증'을
갖고 다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살면서 어떤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의식을 잃고
병원 응급실에 실려갔는데
휴대폰이 다 잠겨있고 신분증이 없다면
당장 누구에게 연락을 해야 할지
의료진도, 경찰과 구급대원들도 난감할 것이다.
특히 이런 경향은 나이가 들면서 더욱 두드러진다.
20대 때는 누군가와 술 한잔을 하거나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사더라도
신분증검사를 자주 하기에
항시 들고 다니지만 30대부터는
솔직히 신분증 달라는 말을
별로 들을 일이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가끔 어떤 사람들을 보면
공공기관이나 은행업무 볼 때 외에는
신분증을 안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다가 진짜 신분증이
필요할 경우가 생기면 난감해진다.
특히 몇 년 전부터는
동네 병원을 가더라도 신분증 확인은 필수가 됐다.
병원은 규모가 크고 작고를 떠나서
인명을 다루는 곳이다.
중복 처방, 대리 처방 등등의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신분증은 물론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가족들의 신분증과
가족관계증명서도 가져가야 한다.
아울러 보이스피싱 같은 범죄조직이 아니고서야
신분증을 달라고 하는 기관은 다
법적인 근거가 있어서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이다.
그들도 상대의 신분을 확인해야
일을 할 수 있고 도와줄 수 있는 것이다.
법적인 절차 없이 딱한 사정,
다 아는 얼굴이라는 이유로 일처리를 했다가는
그들이 곤란해진다.
협조할 게 있으면 응당 해줘야 모두가 좋다.
여러분들이 20대 중후반에
식당과 편의점에서
'신분증 좀 보여주시겠어요'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엄청 좋았던걸 한번 떠올려보자.
그 사람이나 이 사람이나
당신의 신분을 무척 궁금해해서
요구하는 게 아니라
원활한 일처리를 위해서 요구하는 것이다.
이건 기분 좋게 내주면서
저건 '참 까다롭게 구네'라고 생각하시면 안 된다.
이렇게 신분증이 없으면
못하는 일들이 의외로 많다.
아주 오래전, 야구선수 김병현이
여권을 두고 오는 바람에 출국을 하지 못했고
결국 그는 대표팀 명단에서 제외됐었다.
공항에서 일하는 공무원들이
김병현을 모를 리 없고,
대회가 열리는 미국에서도 그는 메이저리그 선수라
적어도 푸대접받지는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여권이 없어서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유명인도 신분증 없으면 끝이다.
나를 증명해 주는,
나의 신분을 보여주는 증표인 신분증은
부피가 큰 것도 아니고
무게가 많이 나가는 것도 아니다.
외국에 나가면 여권을 항상 지참하는 게
상식인 것처럼 우리도
실물 신분증을 항상 지참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