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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 자리, 난 자리

휑한 방을 바라보니 마음이 묘하네

by 레지널드

결혼 생활을 시작한 지 6개월 정도 됐음에도

아직 본가의 내 방을 완벽하게 정리하지 못했다.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기만 하던 작업을 마무리하고자

큰 마음먹고 본가로 향했다.


방 문을 열고 들어가니 침대와 책상이 옛 주인을 반겨줬다.

컴퓨터를 포함한 상당수의 물건들은 이미 옮겼던 터라

약간의 책들만 덩그러니 놓인 빈 방을 바라보니

병실에 누워있는 환자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남은 물건들을 바라보며 추억에 잠겼다.


다른 친구들은 재밌어서 여러 번 읽었지만 나는 이해가 안 가서

여러 번 읽은 책, 내 첫 필사를 함께한 시집과 업무 때문에 산

전문서적들까지..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 이 책들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이번엔 서랍을 열었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들의 앨범이 가득하다.

초등학교 시절, 남자가 왜 이런 씨디를 사냐며 놀림받았지만

꿋꿋하게 듣던 장나라의 2집 앨범.


용돈 차곡차곡 모아서 샀던 엘튼존의 베스트 앨범,

빌리조엘의 첫 내한공연을 기념해 샀던 베스트 앨범과

마이클잭슨을 추모하며 샀던 공연 실황 DVD 등..


나의 감수성을 채워줬고 상상력을 키워 준

이 앨범들에게도 고마움을 느꼈다.

이것들은 가져온 가방에 잘 챙겨 넣었다.


물건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나고 나니

이번엔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아 이 침대, 이 녀석이야 말로

내 친구와 가족들도 모르는 나의 참모습을 알고 있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해줬으며 슬픈 날은 내 눈물을 받아줬고

기쁜 날의 웃음과 포효를 들어줬으며 화난 날엔 나의 샌드백이 되어줬다.


잠시 후, 가구 수거 업체 직원들이 와서 내 책상과 침대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있노라니 정말 마음이 이상했다.


이 방에 처음 들여놨을 때도 옆에서 그 과정을 지켜봤는데

해체하는 모습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전문가들답게 10분도 안 걸려서 작업을 마치고,

5분 만에 그것들을 들고 집을 나섰다.


책상과 침대와는 그렇게 영원한 이별을 했다.


좁게만 느껴졌던 내 방이 무척 넓어 보인다.


하지만 그것에 비례해서

내 마음도 텅 빈 느낌이 들었다.


10년 넘게 썼던 이 방에 이제

내 물건이라곤 없다.

그 황량한 느낌이 내 발길과 눈길을 계속 붙잡았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던가.

가구들의 난 자리는 너무 크게 다가왔다.


20대를 함께 해주면서 한 번도 고장 나지 않았음에 고맙고

내 희로애락을 함께 해준 것에도 고마움을 표한다.


사람뿐만 아니라 사물과의 이별도 참 마음 아프다는 것을 깨달은 날이다.


언제 내 곁을 떠날지 모르는 소중한 내 인연들에게도

조금의 미련이나 후회도 남지 않게 잘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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