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보여주기 싫은 모습도 있다

by 레지널드

나에게 어떠한 일이 생겨도 변함없이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 줄 거라 믿는 내 가족들과 친한 친구들.

그들에게 그러한 일이 생겨도

나 또한 그럴 것이라 스스로 확신한다.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내 진짜 모습을

가족들은 알고 있으며

내가 어디 가서 말하지 못하는 고민들이나

생각들을 친구들은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들 앞에서는 무장해제 된다.


사회에서 만난 이들은

각자의 직급과 직업에 맞춰 불러준다.

대리님, 과장님, 사장님, 선생님 등등.

나 또한 그러한 직급으로 불리지만

가족과 친구들은 언제나 이름으로 불러준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봐주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에게도 보여주기 싫은 모습들이 있다.


특히나 일하는 모습은 정말 보여주기 싫다.

부도덕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방송에 나오는 직업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쑥스럽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하는 직업이다 보니

일하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도 뵌 적이 있고

한동안 연락이 끊겼던 친구들도 본 적이 있으나

이상하게 친한 사람들은 좀 민망하게 느껴진다.

가족들에게는 웬만해선 보여주고 싶지 않은데

언제 한번 누나가 내 직장에 찾아온 적이 있다.

그때는 예정된 시간 한 시간 전부터 긴장이 됐다.

이곳에 오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라

생각하면 되는데 그게 잘 안된다.


이럴 때는 가족들에게 참 미안하다.

적당히 친한 사람,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아는 사람이 왔다면 오히려 더 친절하게

대했을 것인데 가족들은 오지 않길 바라고,

오더라도 말수가 짧아지고 얼굴을 쳐다보지 못한다.

누나를 제외한 나머지 식구들은

내가 일하는 걸 보지 못했으며

상상만으로도 민망한 그 순간을

앞으로도 마주하고 싶지 않다.

shannonlawford-family-6002642_1920.jpg 출처: 픽사베이

일하는 모습 말고도

가족들에게 보여주기 싫은 모습은 더 있다.


바로 친구들이랑 노는 모습이 그러하다.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끼리 모인다고

내 주변 친구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몸을 쓰며 노는 것보다 수다 떠는걸 더 좋아한다.

온갖 이야기가 다 나온다.

몇 년 동안 우려먹어도 질리지 않는 옛날이야기부터

밸런스 게임, 때로는 정치/경제 같은

무거운 주제도 나오는데 그 순간만큼은

나도, 친구들도 순도 100의 '나 자신'이 된다.

소위말해 정신줄 놓고 떠드는 모습,

나름 진지하게 폼 잡고 말하는 모습

모두 가족들에게는 왠지 보여주기 부끄럽다.


그나마 군대 다녀와서는

집에서도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다.

그전엔 어느 정도였냐면

집안 어른 중 한 분이 엄마에게

"쟤는 남자애가 너무 숫기가 없는 것 같다.

말수도 너무 적고. 그러면 큰일인데.."라고 하셨다는데

이 이야기를 친구들한테 해주니 다들 웃었다.

재밌는 건 엄마도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걱정하셨어서 그 후로는 집에서도 잘 떠든다.

하지만 친구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에 비하면

내용도, 수다의 양도 훨씬 적다.


결혼 후로는 아픈 모습도 잘 보여주고 싶지가 않다.

전에는 어차피 매일 얼굴 보고 사니까

숨길수도 없었고 딱히

숨기고 싶은 마음도 없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자잘한 감기 같은 경우엔 다 낫고 나서 얘기한다.

가족들이 걱정할까 봐 말 안 하는 것도 있지만

그냥 밝고 건강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다.

noname_13-birds-5192377_1920.jpg 출처: 픽사베이

이 글을 쓰기에 앞서 동료 직원들한테도

물어봤는데 여러 이야기가 나왔다.

그중 가장 공감했던 건

친구들과의 불화를

가족들이 알지 않았으면 하고,

가족 간의 불화를 친구들이 몰랐으면 한다는 의견이었다.

하긴, 돌이켜보면 어릴 적 친구와 다투고 들어오면

내 표정을 읽은 엄마는 "친구랑 싸웠니?"라고

물어봤고 난 항상 아니라고 했었다.

반대로 집안의 문제를 친구들에게

다 솔직하게 이야기한 적도 없었다.

물론 나이가 들어서는 각자의 집안 문제를 털어놓고

의견을 주고받는 일이 많긴 하지만 알려주기 싫고,

지키고 싶은 것도 있긴 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 글을 읽고

'저게 뭐라고 숨겨?'라고 하실 분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엔 종류만 다를 뿐

분명 누구나 가까운 사람에게도

숨기고 싶은 모습이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나도 잘 모르겠다. 왜 그런 모습들을 부끄러워하는지.

그냥 나 스스로가 당당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서 인 것 같다.

갑자기 문득 아내도 나에게

숨기고 싶은 면모가 있는지 궁금하다.

물어보고 싶지만 괜히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기분이 든다.

그래, 어떤 건 모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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