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추억 - 가구 배송기
스무 살 때부터 알고 지낸 형이 한 명 있다.
형과 나와의 사이는 말 그대로 흉금 없는 사이이다.
어디 가서 말 못 하는 고민이나 비밀을
털어놓기에도 마음 편하고
재미있는 글이나 사진도 서로 공유하며 웃는다.
지금은 그만뒀지만 그 형은 아버지와 함께
가구점을 운영했었다. 큰 규모의 매장은 아니었어서
형은 영업은 물론, 때로는 배송도 직접 나갔었다.
나도 사회생활을 본격적으로 하기 전엔 가끔씩 형과 함께
배송을 했었다. 일이 끝나면 형이 고맙다고 술 한잔 사주고,
가끔씩은 진짜 일당도 주곤 했었는데
나는 그런 건 둘째치고
평소에 타 볼일이 없었던 트럭을 타고 가까이는
압구정이나 청담 (매장이 강남에 있었다), 멀리는
전라도 까지 다니는 그 여정이, 일하러 가는 게 아닌
여행길처럼 느껴져서 참 재밌었다.
차에서 나누는 잡담은 주제도 참 다양했다.
휴게소에 들러 먹는 음식들은 뭐 말할 필요도 없고.
배송지 근처에 가면 형은 손님의 특징을 말해준다.
"이 손님은 다른 제품에도 관심이 많으셨어.
이거 잘 끝내고 이미지 좋게 남겨야 돼" 혹은
"이 물건 하나 사는데 조금이라도 깎아보려고 무진 애를 쓰던 사람이야.
오늘도 무슨 말하면 넌 그냥 배송 담당이라 모른다 하고 나한테 이야기해 줘" 등등
듣는 내 입장에서 가장 무서웠던 손님은 이런 유형이다.
"이 손님.. 매장 왔을 때 '제가 가구에 대해서 좀 아는데',
'저도 가구 공부해 봐서 좀 알아요'라는 말을 많이 했어"
아니나 다를까 가면 피곤해진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그런 고객을 만나면 보는 나도 힘들다.
매장에서야 구매하기 전이니까 그렇다 치지만
구매 결정 후 배송, 설치 단계에서까지 이렇게 구구절절
이야기를 하다니..
한 번은 형한테 정말 저 손님이 말하는 게 맞냐고
물어봤었다.
형은
"그냥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 조합한 거야. 딱 티가 나"라고 말했다.
그 후로는 난 누구와 이야기 하든
"제가 그것 좀 잘 아는데요"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내 의도가 어떻든지 간에 상대방이 진짜 그 분야의
전문가일 경우 내가 섣부르게 실례를 범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래도 이런 손님들한테는 화가 나지는 않는다.
정말 관심 있어서 알아보고, 좀 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화가 나는 경우는 따로 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소파 배송을 갔었는데 기존 소파가 그대로 있는 게 아닌가.
'저 소파는 우리가 가져가는 걸로 계약된 건가'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손님은 우리에게 저 소파를 치워달라고 했다.
쎄 한 기분이 들었다.
거실 한쪽에 세워놓고 신제품을 설치했다.
그랬더니 우리에게 나가면서 저거 들고 버리라고 하는 게 아닌가.
주민센터에서 받은 신고증까지 친절히 건네주면서..
정말 더웠던 여름이었는데 다하고 나서 차에 탄 뒤로도
10분간은 출발 안 하고 쉬었던 기억이 난다.
다행인 건 이런 사람들은 소수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우리에게
물 한잔, 음료수 한잔과 함께 당연한 일을 했음에도
'수고하셨다, 감사하다'는 말을 해주신다.
어떤 날은 손님이 배송비 외에
추가로 만 원짜리 몇 장을 쥐어주신다.
그런 선의를 베풀 이유가 없음에도 베풀어주신 게 참 감사할 따름이다.
손님들은 말 그대로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하지만 강아지들은 다 똑같다.
서울에 있는 주택을 가도,
인천에 있는 공장을 가도,
전주에 있는 아파트를 가도
강아지들은 일단 경계부터 한다.
그러다 10분 정도 지나면
처음 본 나에게 꼬리를 흔들며 살갑게 다가온다.
강아지를 좋아하는 나는 손님에게 만져도 되는지 여쭤보고
(백이면 백 다 허락해 준다) 교감을 나눈다.
강아지들은 날 언제 봤다고 그렇게 애교를 부리는지, 정말 귀엽다.
한 번은 굉장히 넓은 집에 배송을 갔었는데 조그마한 강아지가
다가왔다. 집 크기에 비해 너무나도 작았던 강아지를 보고 나는
농담 삼아 그렇게 이야기했다.
"너 잘못하면 집에서 길 잃겠다"
장담 컨데 그 강아지는 장난감을 물어오라고 던지면 1분 정도는 걸릴 것이다.
우리 집 강아지는 10초 만에 물어올 텐데..
가구를 배송하고 돌아오는 길엔 항상 그런 생각을 한다.
'제발 저 가구 아무 탈 없이 10년은 거뜬하길'
좋은 손님이든 진상 손님이든 제품에는 백 프로 만족하셨으면 했다.
지금은 다른 일을 하는 형은 나에게
'그런 일 도와달라 해서 미안했었다, 마음에 좀 걸렸었다'
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나에겐 정말 소중하고 특별한 경험이었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도 만나고,
다양한 집의 구조 및 인테리어, 가구를 보며 안목도 키웠고
몰랐던 세계도 많이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 일이 아니었다면
고된 노동 뒤 저녁에 마시는
맥주의 청량감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몰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