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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바위보도 지면 안돼

나의 한일전 역사

by 레지널드

이승만 대통령은

광복 후 처음으로 맞붙는 축구 한일전을 앞두고

선수들에게

"경기에서 지면, 현해탄(대한해협)에 빠져 죽으라"

라고 말했다고 한다.


물론, 진위가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지만

한 국가의 원수가 저런 말을 했다는

카더라가 돌 정도면 당시 일본에 대한

우리 민족의 감정이 어떤지 짐작할 수 있다.


하긴 그때는 광복된 지 불과 10년도 되지 않은

1954년이니까 오죽하겠나.

얼마 전, 오랜만에 한국과 일본의 국가대표 축구경기가 있었다.

결과는 아쉽게도 패배로 끝이 났다.

3연패라고 하니 더 씁쓸하다.


경기를 보면서 나의 한일전 역사를 떠올렸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한일전은 그 유명한 도쿄대첩이다.

8살 때였는데, 그때는 월드컵이라든지 국가대항전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냥 한국과 일본이 축구를 한다, 무조건 우리가 이겼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에 봤다. 지고 있던 후반 막판,

연달아 터진 두 골로 극적인 승리를 거둔 그 순간은 잊을 수가 없다.

다음날 동네 애들이 모여 축구를 할 때 모두가

"난 이민성"을 외쳤다. 무슨 연극 놀이도 아닌데..

그리고 그 장면은 9시 뉴스에도 며칠간 나왔고,

방송사들의 애국가 영상에서도

2002 월드컵 전까지 계속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중계를 하던 송재익 앵커의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학교 선생님은 우리에게

"원래 일본과의 경기는 가위바위보도 지면 안된다"

라는 말을 했었는데 어린 나는

그 말이 재밌으면서도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야구팬인 나에게 있어 가장 감격스러운 한일전은

2006년도 WBC 대회에서의 한일전이다.

본선 1라운드에서도, 2라운드에서도 우리는 일본을 이겼다.

1라운드는 일본 야구의 성지인 도쿄돔에서 진행 됐는데

국민타자 이승엽의 홈런,

그리고 우익수 이진영의 호수비가 기억에 생생하다.

당시 일본총리였던 고이즈미가 우리나라 정치인과의 면담에 앞서

"그 수비 때문에 졌다"라고 직접 재현까지 하며

분위기를 풀어나간 사실도 유명하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실패하고 돌아온 이종범이

지난 세월의 울분을 털듯 맹활약한 2라운드도 명승부였다.


하지만 4강전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그래도 한국야구가 일본야구에 비해 크게

뒤쳐지진 않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해 줬다.


그러나 3년 뒤, 그건 생각이 아니라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2009년 WBC 결승에서 만난 일본에게 또 한 번 우리 야구는 무릎을 꿇었다.

이때는 예선전에서도 콜드게임 패를 당하는 등 심상치 않긴 했다.

직전 해인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우리나라가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끼리 맞붙으면 일본의 상대가 안되는구나라고 절감했다.


런던 올림픽 축구 동메달 결정전도 기억에 남는다.

당시 군 복무 중이었던 나는, 부대원들과 새벽에

취사반에 모여 큰 TV로 함께 시청했다.

박주영의 원맨쇼를 보며 우리는

"와 , 병역문제 걸려있으니까 날아다니네"라는

농담을 하며 신나 했었다.


가위바위보 도 지면 안 되는 한일전.

우리 국민들은 한일전을 통해 통쾌함도 느끼고

때로는 슬픔과 분노도 느꼈다.

지리적으로도 매우 가깝고,

무엇보다 역사적인 배경의 특수성 때문에

앞으로도 영원히 양국 간의 스포츠 경기는

치열한 대리전 양상으로 펼쳐질 것이다.


당연히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들은

국가를 대표한다는 자긍심 못지않게

큰 심리적 부담감을 갖고 뛸 수밖에 없다.

다른 나라와의 경기에서 패 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비난이 쏟아지기에 그 심정은

보기만 하는 나로선 쉽사리 짐작조차 어렵다.


애국심과 소속감을 중요시하는 우리 한국인들은

종목을 불문하고 태극 마크를 달고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들에게 스스로를 대입한다.

그리고 승리했을 때는 내가 이긴 것 마냥 기뻐하고 환호한다.

그러나 패 했을 때는 자연스럽게 선수의 몸에서 빠져나와

그 어느 때보다도 냉철한 제3자가 된다.

'정신력이 문제다', '일본이 발전하는 동안 뭐 했냐' 등등

날카로운 분석은 덤이다.

월드컵 기간엔 전 국민이 감독이 된다는

한 축구인의 하소연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들에게 감정 이입해서 승리를 즐겼으면

그들의 패배에도 똑같이 감정을 느끼고 위로해줬으면 한다.

제일 힘든 사람은 그 경기에서

패한 선수들이지 보기만 한 우리가 아니다.


즐거움을 누릴 땐 '우리',

슬퍼하거나 분노할 땐 '너희'가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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