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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by 레지널드

연장근무를 하는 날이면 난 항상 고민에 빠진다.

택시를 탈것인가 말 것인가.


정시퇴근 했다면

택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지만

평소보다 늦게 끝났고,

퇴근시간대도 지났기에 차도 그리 막힐 시간이 아니다.

무엇보다 정해진 시간보다 길게 일해서

몸이 지칠 대로 지친 상태이기 때문에

나를 위한 선물을 줄까 하고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아무리 힘들어도 집과 직장의 거리가 멀다면

택시비가 두려워 애초부터 고민하지 않았겠지만

나의 경우, 지하철로 두 정거장이라서

비용도 그다지 부담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 깊게 고민하게 된다.


택시는 나에게 그런 존재다.

평상시에는 탈 생각을 못하고

너무 힘든 날이거나,

덥고 추울 때에만 진지하게 이용을 고려한다.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 시절 택시는 나에게 부의 상징이었다.

운전하는 사람도, 타는 사람도 여유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렸을 적 우리 집 옆집에 살던 가족과 친했는데

그 집 아저씨는 택시를 운전하셨다.

이틀 일하고 하루 쉬는 개인택시 운전자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성실의 아이콘이었다.

일정한 시각에 나가고 일정한 시각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일정한 시각이라는 게 새벽시간대다. 참 대단했다.

가끔 그 집에서 놀다 보면 피아노 위에 올려진

아저씨의 지갑을 볼 때가 있는데 항상 현금이 가득했다.

그 당시엔 카드결제나 계좌이체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일수밖에.


그 아저씨를 보면서 어린 나는

'아 택시기사도 돈 많이 버는 직업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점점 커가면서 깨달은 사실은

택시기사가 참 힘든 직업이라는 것.

좁은 공간에서 늘 같은 자세로 육체노동을 하니

건강관리 제대로 안 하면 퇴직 후

고생길이 펼쳐지는 건 안타깝지만 피할 수 없다.

장시간 비행의 후유증인

'이코노미 증후군'은 택시기사들에게는

늘 동반되는 대표적인 질환이다.


지하철과 버스가 당연했던

우리 집 식구들에게 택시 이용은

정말 가끔 있는 특별한 일이었다.

엄마는 영하 10도의 날씨에도

꿋꿋하게 배차간격 멋대로인 버스를 기다렸고

(20년 전의 서울 버스 체계는 지금과는 차원이 다르게 엉망이었다)

중학생이던 누나는 햇빛 내리쬐는

한 여름에도 도보 40분은 그냥 걸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돈은 쓰고 살아도 됐었는데

뭘 그렇게 독하게 살았는지..

그때의 기억들 때문에 나에게 택시는

여전히 고민거리인가 보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이다.

동작구 사당동에서 늦게 까지 술자리를 갖다가

시간을 보니 대중교통이 끊긴 시간이었다.

그때 택시를 타고 내가 살던 노원구 하계동 까지 오는데

'아 이제 이런 택시비 정도는 부담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괜히 나 자신에게 흡족했다.


택시 하면 떠오르는 한 가수의 일화가 하나 있다.

그 가수는 지방에 있는 행사를 위해

내려갔다가 그 지역 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매우 피곤해하길래 그 기사에게

"기사님 하루에 얼마 정도 버시냐"

묻고 내릴 때 그 금액을 지불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내가 그 돈 드렸으니까, 오늘은 그냥 댁에 가셔서 푹 쉬시라"

라고 했다고 한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저런 행동은 쉽게 나오는 행동은 아니다.

그 가수는 경제적 여유뿐만 아니라

마음의 여유도 함께 갖춘 것이다.


반대로 택시 기사가 마음의 여유를 갖고 있는 경우도

우린 미디어를 통해 종종 접한다.


급하게 병원으로 가야 하는 아이와 아이엄마에게

요금을 받지 않았던 기사의 뉴스를

봤을 땐 아직까지는 살만하구나라고 느꼈다.

한 외국 관광객이 호텔에서 공항까지 택시를 타고 갔는데

택시에 그만 귀중품을 놓고 내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택시기사는 아무런 대가 없이

승객을 태운 호텔에 직접 물건을 가져다줬고

이에 감동한 외국인이 본인의 SNS에

이 사연을 올렸다는 기사도 본 적이 있다.

위 사례에 나온 아이 엄마와 외국인은

아마도 살면서 결코 나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라 본다.

사람이 사람에게 감동을 받으면

엄청난 선순환이 일어난다고 난 믿기 때문이다.


무작정 절약해야겠다는 생각에

택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내가

지금은 '이유가 타당할 때'는

택시 타는 걸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먼 거리여도 타는 게 낫다고 판단하면

요금 생각 안 하고 탈 정도로 예전과 달리

약간의 경제적 여유는 생겼다.


이제 나도 미담에 등장하는 가수와

기사들처럼 마음의 여유를 챙길 차례다.


돈도 그렇고 선행도 그렇고 하루아침에

쌓을 순 없기 때문에 지금부터 차근차근

쌓아나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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