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운걸 잘 못 먹는다.
전 세계에서 히트 친 불닭볶음면은
친구가 먹을 때 한입 먹은 게 전부이며
라면도 순한 맛 위주로 먹는다.
이유는 속에서 안 받쳐준다기보다는 땀 때문이다.
매운 걸 먹으면 땀이 비 오듯 흐르는데
그 모습을 남들 앞에서 보여주기가 민망하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내 모습이 싫고.
하지만 그 '비 오듯 흐르는 땀'을 감수하고서라도
종종 먹는 음식이 있는데
바로 부대찌개다.
부대찌개를 처음 먹었던 곳은 식당이 아닌 집이었다.
'엄마가 김치찌개 준비를 하나' 싶었는데
평소와는 재료가 달랐다.
라면, 햄/소시지, 두부 등 내가 좋아하는 재료들이 많이
올려져 있어서 이게 뭔가 싶었다.
한입 딱 먹는 순간 햄에서 나오는 그 짠맛과
약간 걸쭉한 국물이 온몸에 쫙 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부터 부대찌개와의 인연은 시작됐다.
'의정부식'만 먹으며 자라다, 성인이 되어
치즈가 들어간 '송탄식'을 처음 먹었을 때도 기억난다.
치즈로 인해 점도가 짙어진 국물이 계속해서 밥을 먹게 만들었다.
정말 맛있었지만 결국에 내 입맛은 '의정부식'으로 돌아왔다.
군대에서 먹은 말 그대로 진짜 '부대찌개'의 추억도 있다.
내가 있던 부대는 독립부대라 비교적 자유로웠다.
(쉽게 설명하자면 직영점이 아닌 가맹점 형태의 부대)
한 달에 한번 취사병이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는 날이 있었고
누군가의 요청으로 부대찌개가 나온 날이 있었는데
때맞춰 비도 내렸고
딱 한잔씩 허용됐던 소주도 참 좋았다.
밖에서 먹었던 것보다 더 맛있었던 건
장소와 메뉴가 딱 들어맞는
특수성과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취사병들이 요리를 잘해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현재까지 내가 먹은 가장 맛있었던 부대찌개였다.
가공육이 각종 암을 유발할 수 있다는 기사를
하도 많이 봐서 그런가
언제부턴가 난 햄과 소시지를 거의 먹지 않는다.
하지만 부대찌개 먹을 때만큼은 그냥 나 자신을 내려놓는다.
햄 없는 부대찌개는 상상할 수 없다.
그리고 라면사리는
몇 명이랑 가던 기존 개수에 하나 더 추가한다.
일반적인 라면과 부대찌개 속 라면은
전혀 다른 음식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더 특별하게 맛있기 때문이다.
물론 엄청나게 흐르는 땀이 불편한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이 메뉴 앞에서는 능청스럽게,
아무렇지 않은 척 이마와 목에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낸다.
부대찌개의
탄생 배경을 보면 아시겠지만
'외국의 식재료가 주 재료인 한식'이라는
독특한 포지션을 갖고 있다.
또한, '한식'이라고 표현하는 음식들 중에서
가장 역사가 짧지만 빠르게 우리 문화에 녹아들었다.
그래서 갖고 있는 또 하나의 장점은
절대로 빼앗길 수 없다는 점이다.
중국은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역사는 물론, 음식과 문화까지
'한국의 그것은 원래 우리한테서 유래했다'는
주장을 펼치는데 이 음식만큼은 결코 그럴 수가 없다.
6.25 전쟁 때 미군부대에서 나온 잔반으로 만든 게 유래인데
그걸 뺐으려 거짓말하려면
꽤 골치 아프다는 걸 본인들도 알 것이다.
부대찌개가 남녀노소 모두에게
인기가 많은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맛이 없을 수 없는 재료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재료들은
부대찌개가 앞으로 넘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가공육, 라면, 그리고 짠맛을 동반한 이 음식은
사실 건강에 좋은 음식은 아니다.
그래서 새로운 레시피의 개발이 필요하다고 본다.
특히, 염분을 최대한 낮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
부대찌개가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시급했던 문제는
먹고사는 것이었다.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사람들도
많았던 그때, 영양분을 따지는 건 사치였다.
하지만 지금의 대한민국 사람들은 경제적 수준도 올라갔고
단순히 먹고 배를 채우는 것보다는
양질의 음식을 먹고 건강을 챙기는 걸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제 우리를 위협하는 건 영양실조가 아닌
고혈압, 당뇨병 같은 성인병이다.
사람들은 건강에 해로운 건 멀리 할 테고
그렇게 되면 지금 당장은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우리에게 사랑받는 음식이라도
장래에는 사라질 수도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다양한 버전의 밀키트가
개발되어 여러 가지 재료를 준비해야 하는
불편함은 사라졌다.
이제는 그 기술력의 초점을
건강으로 맞춰야 할 차례다.
한국식 정크 푸드처럼 탄생했지만 언젠가는
건강한 맛을 내는 부대찌개의 출현을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