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레슬링

한때는 국민스포츠였지만 지금은 완전히 사멸 돼버린..

by 레지널드

얼마 전 미국의 프로 레슬러 헐크 호건이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를 접했다.


그는 단순한 프로레슬러가 아닌

미국 대중문화사에도 큰 족적을 남긴 운동선수였고

트럼프 대통령도 곧장 애도의 뜻을 표했다.

(사적으로 둘이 친해서 일수도 있다)


그의 활약상과 생애를 조명한 기사들을 읽다 보니

프로 레슬링과 관련된 추억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나는 사실 프로레슬링 세대가 아니다.

박치기왕 김일 선수와 관련된 전설 같은 스토리와

인기는 만화 검정고무신에서만 봤었고

초등학생 때, 아주 소수의 친구들만

쉬는 시간에 자기네들이 본 WWE를 재현하며 놀았다.

이미 저물 대로 저문 스포츠가 프로레슬링이었다.


그때 즈음이었다.

개그맨 백재현이 프로레슬링에 도전하는 콘셉트의

예능 프로그램이 큰 화제를 모았고

거기에 출연한 실제 프로 레슬링 선수들 중

긴 머리가 인상적이었던 이왕표 선수,

그와 대조적으로 빡빡 깎은 머리의 노지심 선수가

초등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배우 송강호 주연의 영화 반칙왕이 개봉한 것도 그 시기였다.

평범한 회사원이 프로레슬링을 배우는 내용이었고

평가나 흥행은 그저 그랬으나

잠깐이나마 프로레슬링이 다시 인기를 끌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프로레슬링이 국내에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은 단연

1960년대와 70년대라고 할 수 있다.

박치기왕 김일 선수가

큰 체격의 서양 선수들을 퍽퍽 쓰러트리고

우리 민족의 한을 달래듯 일본선수들을 박치기로 기절시키는

장면들을 보면서 국민들은 엄청난 희열을 느꼈다.


김일 선수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마을에 몇 대 없는 TV 앞에

온 사람들이 모여 경기를 지켜봤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일 선수를 초청해 식사도 몇 번 했을 정도로

김일과 프로레슬링의 위상은 실로 대단했다.

하지만 장영철 선수의 이른바 '프로레슬링은 쇼다'

발언 이후 대중들 사이에서 인식은

미묘하게 그전과는 변하기 시작했고

80년대 들어서는 완전히 관심에서 멀어졌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앞서 언급한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한 이왕표, 노지심 선수가

스타플레이어였지만 그들이 훈련하는 체육관이나

경기장 인프라가 당시 시대상을 감안해도 무척 열악했다.

아주 잠깐이나마 일었던 인기가 사그라 들고나서는

프로레슬링은 아예 사멸되다시피 돼버렸다.


시간이 흘러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김일 선수가 세상을 떠났다. 내가 살던 동네의

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하다 돌아가셨어서

기자들이 많이 몰렸던 장면도 기억이 난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도 애도의 뜻을 표했고 얼마 후

국립현충원에 모셨을 정도니

지금 미국 내의 헐크호건 추모 분위기보다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그가 박치기왕이라는 별명을 얻기 위해

얼마나 모진 훈련을 견뎠는지

그 후에야 알았다.

야구 방망이,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았고

스승인 역도산에게 훈련을 빙자한

폭행도 당하면서 링 위에 올랐다.


사실 이런 무자비한 훈련법과 경기 내용이

인기 하락에 한몫했다고 본다.

지나치게 가학적이고 폭력적인 장면은 처음엔 사람들의

호기심과 관심을 끌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다. 그런데 계속해서 자극적인 면만을 추구하고

그러기 위해 작위적인 연출을 하게 되다 보니

대중의 외면을 받는 게 당연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스포츠 중계를 보면 가장 흔하게 등장하는 표현이

'각본 없는 드라마'인데 프로레슬링은 각본이 짜여 있다.

이러니 누가 감동을 느끼겠는가.


무엇보다 저런 위험한 스포츠를

어떤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권장할지 의문이다.

모든 스포츠 선수들이 은퇴하면 하나둘씩 선수시절의 후유증이

몸에 나타난다고 하지만 생명의 위협을 가할 질병은 거의 없다.

하지만 프로 레슬링선수들은 상황이 다르다.

뇌질환은 기본이요 일부 외국 선수들의 경우,

스테로이드 약물 복용으로 인해

심혈관계 질환까지 달고 산다는 뉴스도 있다.

경기를 뛸수록 자신의 수명이 줄어드는

종목에 과연 어떤 선수가 참여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그 잔혹한 경기를 봐주겠는가.


우연히 한 달 전쯤, 미국 프로레슬링 경기를 TV로 본 적이 있다.

방영시간대도 사람들이 거의 TV를 보지 않는 새벽 시간대였다.

보는 내내 웃겼다.

'이제 스포츠인걸 포기하고 아예 예능으로 콘셉트를 바꿨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억지라서 웃겼다.


현실에 안주해 발전을 도모하지 않으면

위기가 닥쳤을 때 엉뚱한 방향으로 가게 되고

결국에는 사멸된다는 것을

우린 프로레슬링을 통해 여실히 목격했다.


야구와 축구 못지않게 큰 인기를 누린 종목임에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 사례를 지금의 스포츠계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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