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차가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선물
오랜만에 연차를 내고 쉬는 날.
평소와 같은 시간에 절로 눈이 떠진다.
그래도, 기분은 특별하다.
아침 8시, 평소의 나는 지하철역으로 출발하지만 오늘은 중랑천으로 향한다.
그곳엔 진작부터 나와서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쫄쫄이 유니폼을 입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거친 숨소리를 내며 달리는 사람들, 나처럼 여유롭게 걷는 사람들,
프로골퍼 못지않게 진지한 표정으로 파크 골프를 치는 어르신들 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숙여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던 지하철 모습과 대비된다.
훌륭한 아침공기를 만끽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한 무리의 아이들이 보인다. 아니, 여럿 보인다.
근처에 초등학교가 있는 건 알았지만
학생들을 본 적이 없었던 나로선 생경한 풍경이다.
잠시 나의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려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샤워를 마치고, 여유 있는 모습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커피를 마신다.
오늘은 커피 향도 더 좋게 느껴진다. 신문을 읽으며 세상 걱정을 한다.
내 걱정만 하며 살던 내가 세상을 걱정하다니..
역시 사람은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햇빛이 점점 세지기 시작하는 오전 10시 즈음, 동네는 고요하다.
인적이 없는 주택가라서 그런지
새의 지저귐, 택배차량의 소리가 유독 크게 느껴진다.
신문을 다 읽고 나니 미뤄왔던 집안일이 하나씩 떠오른다.
'그래, 청소를 하자. 아침 먹고 하지 않았던 설거지도 하고'
집안일을 마치고 나니 엄마 생각이 난다.
자식들 키우느라 이 시간엔 항상 일터에 있었고
퇴근하고 집에 와서는 다른 주부들이 오전에 했던 집안일을 하던 우리 엄마.
일은 하지 않았으나 늘 점심을 먹던 오후 1시에 다다르자 배가 고파진다.
'오랜만에 쉬는 거니까 나를 위한 선물을 하자. 순댓국 한 그릇 해야지'
집 근처에 시장이 있다는 건 축복이다.
맛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는 식당들이 많기에.
퇴근 후 지나갈 때 보면, 술 한잔 하는 어른들로
늘 만석이던 순댓국 집으로 향한다.
아, 예상과 다르다.
나 혼자 여유 있게 식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식당은 이 시간에도 사람이 많다.
혼자 앉아 먹기는커녕 딱 하나 남은 자리에 겨우 앉았다.
구내식당에서만 점심을 먹던 나로서는 문득 궁금해진다.
'이 사람들은 전부 어디서 오는 걸까? 나처럼 오늘 쉬는 사람들인가? 근처 직장인들인가?'
식사를 마치고 시장을 천천히 돌아본다.
저녁에 보던 시장보다 훨씬 활기차다.
평일 낮, 이곳에서 장을 보는 사람들을 보며 아까와 같은 생각을 해본다.
다시 돌아온 집. 왜 이렇게 침대가 커 보이는 걸까? 그래, 좀만 누워있자.
누워서 핸드폰을 뒤적인다. 화면이 점점 흐려진다. 그러나 잠을 잘 순 없다.
'이 소중한 시간을 잠으로 보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래, 영화를 보자. OTT에 들어간다.
맙소사, 이렇게 재밌는 게 많았다니. 뭘 봐야 할지 모르겠다.
시간도 많은데 천천히 골라보자.
금방 끝날 것 같던 내 선택은 무려 10분 넘게 지속된다.
고심 끝에 고른 영화. 이제 진득이 보자.
커튼을 다 쳐도 뚫고 들어오는 밝은 햇빛이 조금 거슬리지만 행복하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밖에서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린다.
커튼을 걷고 슬쩍 바라보니 학생들이다. 중학생, 초등학생 할 것 없이 많이 보인다.
오후 4시, 벌써 이들이 학교를 끝나고 집과 학원으로 흩어지는 시간이 됐구나.
오늘 본 영화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리뷰를 검색해 본다.
같은 것을 봐도 이렇게 다양한 생각을 하는구나,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구나 하면서 즐거움을 느낀다.
근데 점점 집에 그늘이 진다.
핸드폰 상단을 보니 시간은 오후 5시를 넘겼다.
슬슬 아쉬움이 밀려온다.
밖에선 아까보다 더 많은 소리가 들린다.
남들보다 이른 시간에 퇴근하는 직장인들이 합류했다.
오전엔 택배 차량 소리만 들렸다면 오후엔 거기에 더해 학원 차 소리도 섞인다.
이번엔 나의 중,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라 미소 짓는다.
오후 6시, 아내의 배웅을 나선다. 가는 길,
나 혼자서 여유를 느낀 것에 약간의 미안함이 든다.
먼발치에서 아내가 보인다.
나를 본 아내는 "쉬어서 그런가 얼굴이 뽀얗네" 라며 농담을 던진다.
바쁜 일과를 보냈을 아내 앞에서 나는
쉬느라 바빴던 내 일과를 브리핑한다.
신나게 떠들다 보니 어느덧 집에 도착.
오늘만 세 번째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다.
아내와 함께 저녁을 먹고, 평소와 다름없는 시간을 보내고 침대에 눕는다.
'아 하루만 더 쉬고 싶다'
하루 종일 휴식을 취한 내 머릿속에 이런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그래, 내일은 열심히 일해야지. 그래야 오늘 같은 날이 더 행복하겠지'
찬바람을 쐬고 이불을 덮을 때의 그 기분을 느끼며 잠을 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