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하게 대화의 벽을 허물수 있는 한국인의 도구
어렸을 때, 엄마 친구분들이나 이웃집 아줌마들이 우리 집에 오시면
엄마는 항상 커피를 내어놓았다.
90년대 가정집에 캡슐커피나 드립커피가 있을 리 만무했다.
블랙커피만 마시는 사람, 블랙커피에다 설탕만 조금 넣는 사람 등
커피 한 잔에도 각자의 취향이 엄격히 정해졌다.
그러나 그 틈바구니 사이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즐기기에 무난한 커피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노란 비닐에 담긴 커피믹스.
조그마한 비닐 안에 커피와 설탕, 프림이 모두 갖춰진 이 마법 같은 제품은
우리 집에 온 손님 모두를 만족시켰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들은 쉬는 시간마다
커피믹스가 담긴 종이컵을 손에 쥐고 계셨다.
무슨 맛인지 궁금해서 한 번만 마셔보면 안 되냐고
물어보면 모든 어른들이 똑같이 대답했다.
"애들 마시는 거 아니야, 나중에 어른되면 마시자"
그래도 그때는 착한 아이였다. 어른들이 마시지 말라고 했으니 안 마셨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몰래 마실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중학생이 되었고 뜻하지 않게 처음 커피믹스를 마신 일이 있었다.
명절에 큰집에 갔는데, 큰엄마가 커피를 내어놓셨다.
어른들이 하나씩 컵을 가져가셨는데 딱 한잔이 남았다.
큰엄마는 나에게 "하나 남았네. 마셔" 하셨고
'그래, 어른이 주신 거니까 마셔도 돼'라고 생각하며 마셨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그때의 기억이 완벽하게 되살아났다.
'와.. 이렇게 맛있는걸 왜 못 마시게 한 거지?'
정말 신기했다. 입에 넣었을 때는 무척이나 달달한데,
목으로 넘길 때는 씁쓸함이 쫙 퍼진다.
더위사냥 보다 더 맛있었다.
그 이후 고등학생이 돼서는 주말마다 마셨다.
일요일 오전, 커피믹스 한잔과 함께 라디오를 틀고 게임을 하면
나는 그 어떤 사람도 부럽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 난 대학생이 되었고
어른이 되면 정말 커피믹스를 달고 살 것 같았던 내 예상은 빗나갔다.
친구들과 선배들은 모두 "아저씨도 아니고 그걸 왜 마시냐" 라면서
아메리카노를 마셔댔고 언론에서도 잊을만하면 주기적으로
복부비만의 원인이라고 커피믹스를 망신 줬다.
'비만의 원인은 운동부족이다. 커피믹스는 죄가 없다'라고 생각하며
집에서, 남들 몰래 한잔씩은 마셨다.
그러고 나서 난 군대에 갔다. 군대는 커피믹스가 귀한 대접을 받는 곳이다.
자대 전입 후, 대대장과의 신병 면담에서 대대장이 직접 타준 커피믹스가 잊히질 않는다.
군기 바짝 든 나를 조금은 느슨하게 만들어줬던 커피 한잔.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방금 전까지 무섭게만 느껴지던,
1년 9개월을 어떻게 버텨야 할지 깝깝하게만 느껴지던 부대가
'사람 사는데 다 똑같지, 잘 지내보자'라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의무병이던 나는 전역할 때까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의무대에 놀러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커피를 권했다.
그들과 조금이나마 더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커피믹스의 매력적이고, 위력적인 힘을 여실히 느끼고 제대를 했다.
대학생활을 마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 사이 커피믹스는 전보다 더 많은 공격을 받았다.
내 또래들에게 커피믹스는 '뱃살과 입냄새의 원인, 치아 착색을 유발하는'
나쁜 음료로 인식되고 있는 것 같다.
'아메리카노'라는 강력한 상대가 자리 잡고 있고,
간편한 캡슐커피의 등장으로 '편리함'이라는 장점도 조금씩 희석되고 있다.
물론 아메리카노 또한 사랑한다.
아메리카노의 각성 효과도 무척 뛰어나고, 솔직히 말하면
커피믹스를 좋아하는 나도 이제는 다른 커피와 얽힌 추억이 더 많다.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스타벅스에 가서 마신 캐러멜 마키아토,
첫 출근날 선임이 사준 아메리카노, 본 고장에서 처음 마셔본 에스프레소까지..
그러나, 커피믹스가 주는 그 나름의 감성이 있다.
그 감성은 아메리카노나 값비싼 그 어떤 커피로도 대체할 수 없다.
나는 하루 한번 이상은 마셨고 지금도 마시고 있다.
안 마시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맛없어서 안 마시는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이 맛있는 한잔의 커피, 이 커피는 지금껏 우리에게
좋은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되어 주었다.
처음 본 사람에게 권해도 실례가 아니며,
어색한 사람끼리의 커피 한잔은 대화의 물꼬를 터준다.
고된 노동을 해야 하는 공장이나 현장 근로자들의 휴게실에도 늘 비치되어있고
밤새 불이 켜있어야 하는 병원, 소방서, 경찰서에도 늘 커피믹스는 함께 할 것이다.
시골에 계신 노인분들의 집을 가도 캡슐커피보다는 커피믹스가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이렇게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아 온 커피믹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나는 계속 함께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