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조심해도 얼룩은 묻기 마련
햇빛이 따스하다. 바람도 적당히 솔솔 불어온다.
빨래를 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날은 없다 판단하고
세탁기에 옷감을 넣는다.
'왜 소스를 흘렸을까', '대체 이건 어디서 묻은 거지?'
옷을 하나씩 넣으면서 입었을 때의 내 행동을 반추해 본다.
세제와 섬유유연제를 넣고 시작 버튼을 누른다.
통돌이 세탁기를 쓰다가 드럼 세탁기로 바꾼 지 얼마 안 된
나는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그것은 몇 분 간 멍하니 돌아가는 세탁기를 쳐다보는 것.
상용화된 지 100년도 넘은 장비이지만 막상 돌아가는걸 본지는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가 멍하니 바라볼 때가 있다.
투명한 창을 통해 세탁물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하다.
손으로 아무리 비벼도 빠지지 않는 얼룩, 흔적들이 저 기계 안에선
싹 빠져서 나오고 세균까지 없애준다.
사람의 노동력을 확 줄여주는 고마운 장비다.
물이 채워지고, 돌아가면서 거품과 함께 세탁이 진행되고
마지막에 탈수까지 마치고 나면 모든 과정이 끝난다.
여느 때처럼 잠시 세탁기를 바라보던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삶의 얼룩도 지우고 싶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감사하게도 나에겐 좋은 기억들이 정말 많다.
소중하면서 사랑스럽던 그 기억들은 평생 잊고 싶지 않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네 삶은
좋은 기억 못지않게 나쁜 기억도 오래간다.
논리 정연하게 대응하긴커녕 말을 더듬었던 그때,
본의 아닌 실수로 갑분싸 된 그 자리,
남에게 상처받은 기억, 상처를 줬던 기억 등등..
되돌리고 싶은 순간, 후회했던 행동들이 떠오른다.
생각하지 말아야지, 하면 더 깊고 생생하게 각인된다.
'내 마음도 저 세탁기에 넣고 돌리면
묵은 때 같은 그런 기억들도 빠질까..'
라는 영화 같은 상상을 해본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내 인생은 얼마나 더 윤택해질까 라는
행복한 상상으로 이어간다.
하지만 상상을 마치고 현실로 돌아오면 그 안 좋았던 기억만 남는다.
고로, 나는 손해 보는 장사를 한 것이다.
기분 좋게 빨래 시작했다가 결과적으론
잊고 싶었던 기억을 괜히 끄집어낸 꼴이 됐다.
그래서 또 한 번 생각을 고쳐먹는다.
"의도치 않게 옷에 소스를 흘리고 원인도 모르게 묻은 저 얼룩들처럼
내 안 좋은 기억들도 모두 의도치 않게, 원인도 모르게 생긴 것 들이다
그러니 반성은 하되 분노도, 원망도, 자책도 말자.
지금 와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현재를 살자"
그렇게 생각하니 또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아주 잠깐 들었던 분노와 후회가 거품과 함께 빠져나간다.
깨끗하게 세탁이 끝난 옷을 건조대에 널면서 또 한 번 긍정을 불러일으켜봤다.
"그래, 이 옷 입고 내가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영원히 깨끗하진 않을 거야. 옷을 버리지 않는 한,
소스도 튈 거고 냄새도 베길거고, 어디서 생긴지도 모르는
얼룩도 생기겠지. 괜찮아, 그때마다 또 빨면 되니까.
그러니 조심하되 근심하지 말자"
모든 빨래를 널고 나니 햇빛이 반사돼서 그런지 옷이 더 밝아 보인다.
내 마음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