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슬슬 헤어지고 싶은데

선풍기야, 언제 들어갈래

by 레지널드

9월인데도 아직까진 덥다.

사람들이 선선해졌다고는 하는데,

더위를 많이 타는 나는 아직 까지 체감을 하지 못하겠다.


그래도 한밤의 기온은 낮아진 것 같아

에어컨은 껐다. 하지만 선풍기는 켜놓고 잔다.

나와 반대인 아내는 춥다고, 몸에 안 좋다고 끄자고 하지만

더워서 한번 깨면 잠을 계속 설치는 나로서는

미안하지만 타협할 수 없는 분야다.


나라고 안 끄고 싶진 않다. 하나, 더운데 어쩌나.

나도 선풍기와 헤어지고 싶다.

아마도 이 선풍기는 10월 초까지는 계속 쓸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선풍기'와 관련해서 빼놓을 수 없는 괴담이 하나 있다.

바로 선풍기를 켜고 자면 죽는다는 이야기.

지금이야 그걸 믿는 사람이 많이 줄었다지만

십여 년 전만 해도 그 이야기를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해준 사람은 심지어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셨다.

그래서 나도 어렸을 때는 그 괴담을 믿었다.

한 번은 내가 방에 창문을 닫고 선풍기를 튼 채, 낮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방문도 닫혀있었다.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죽을뻔했네' 라며 안도했던 기억도 있다.


어렸을 적, 선풍기에다 대고 소리를 내면

이상한 소리가 울리는 게 재밌었다.

돌이켜보면 별거 아닌데도 왜 그렇게 재밌었는지..

더 재밌는 사실은 3살인 우리 조카도 선풍기에다 대고

소리를 내면서 즐거워한다.

시대와 무관하게 사람들은 비슷한 시기를 겪나 보다.

물론, 선풍기의 기종은 그때와 차원이 다르다.

어렸을 때 내가 썼던 선풍기는 일반적인 선풍기였으나

요즘은 날개 없는 선풍기가 대세다.

그리고 천장에 달고 쓰는 실링팬을 설치한 가정도 많이 늘었고.

초등학교 때 친구네 집에 놀러 갔는데

리모컨으로 선풍기를 조절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는데

이제 웬만한 선풍기는 그런 기능을 탑재하고 있다.


대부분의 학교에 에어컨이 대부분 설치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꿈도 못 꾸던 상황이다.


한 반에 45명 정도 있었는데 선풍기 4대로 여름을 버텼다.

천장에 달린 두 개, 벽에 달린 두 개.

체육시간, 점심시간이 끝난 후에는 친구들이 모두

그 앞으로 달려가 바람을 쑀는데

그 조그마한 선풍기 앞에서 애들이 다 몰려있으니

열기가 식히기는커녕 더 덥게 느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선풍기 근처자리라고 해서 좋은 건 딱히 없다.

양손으로 누르고 있지 않으면 교과서는 휘리릭 넘어가버리고

5월, 9월에는 각종민원에 시달려야 한다.

누구는 꺼달라, 누구는 더우니까 더 세게 틀어달라 등등..

지하철에서 냉방을 놓고 문자대전이 벌어지는 요즘의 상황과 비슷하다.


'가만히 있으면 시원해진다'라는 말을 제대로

실감한 여름이 있었는데 바로 군대에서 보낸 여름이다.

자대전입받았을 때가 여름이었는데 이등병이다 보니

당연히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행정일을 해서 일과시간엔 선풍기를 곁에 둘 수 있었지만

일과 이후 생활관에선 선풍기 자리에 앉을 엄두도 못 냈다.

그렇게 무더운 여름을 보내고 나니 그다음 해 여름,

나름 선임급이 되었음에도 선풍기 자리를 고집하지 않았다.

그냥 앉아서 부채질하거나, 주말에는 샤워하고 자리에 누워 가만히 있었다.

금세 시원해진다. 재밌었던 건 내가 있던 부대는 시설이

워낙에 열악한 부대라서 한 생활관에 50명 정도 있었는데

선풍기는 4대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들 대단했다.


몇 년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한 손에 들고 다닐 수 있는

휴대용 선풍기를 많이 가지고 다녔는데

또 어느 새부턴 가는 들고 다닐 필요도 없는

목걸이형 선풍기가 대세가 되었다.

앞으로 점점 무더워질 여름, 또 어떤 스타일의 선풍기가

우리를 찾아올지 기대된다.


가을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하루빨리

선풍기와 이별하고 싶다.

그전에,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깨끗하게

닦고 헤어져야지. 날개도 빼서 세제로 닦아주고

안에 진득하게 묻은 기름때도 닦아주고.

안 그러면 내년에 가동할 때가 골치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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