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기는 축복이다

소고기를 접하고, 나의 식습관이 달라졌다.

by 레지널드

'소고기 사주는 사람을 조심하라. 분명 다른 뜻이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인터넷에서 떠도는 재밌는 글이었다.


돼지고기나 닭고기에 비하면 고가인 소고기를

선뜻 사주는 사람은 다른 저의가 있을 거라는 추측인데,

사실 나도 가격이 부담스러워서 그렇지 소고기를 정말 좋아한다.


제대로 된 소고기를 먹었던 적은 중학교 때였던 것 같다.

엄마가 회사에서 받아온 선물이었는데 한우였다.

그때만 해도 그냥 '고기니까 맛있구나' 하면서 먹었다.

그 후로는 소고기를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잊으래야 잊을 수가 없는 소고기와의 만남이 있었다.

당시 누나의 남자 친구이자, 현 매형이 나를 데리고 간 한 소고기집.

생전 처음 들어보는 상호명에 허름한 외관,

인근은 온통 공사 중인 왕십리의 한 식당이었다.

그렇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외관과는 다르게 정갈하고 넓었다.

그래도 뭐 고기가 고기겠지 싶었고 이윽고 주문한 등심이 나왔다.

먹는 순간, 그냥 신세계였다. 고기가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구나..


음식에 어떠한 간도 하지 않았고 소스를 찍어먹지도 않았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고기 자체만 먹었을 뿐인데 이렇게 맛있다니..

그날의 고기맛은 생생히 기억나지만

식당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후로 뭘 했는지 따위는 기억나지 않는다.

엄청난 고기맛이 그날의 모든 것을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길, '진정 맛있는 음식이란 무엇인가'라는

나름 철학적인(?) 고민을 하면서 왔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

"진짜 맛있는 음식은 재료가 좌우하는 것이며,

그 음식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선 재료 본연의 맛에만 집중해야 한다"


나는 먹는 방식을 통째로 바꿨다.

고기를 먹든, 튀김을 먹든 늘 소스를 찍어먹는 걸 선호했던 난,

그 후론 소스를 멀리한다.

튀김도 간장에 찍지 않고, 순대도 소금에 찍어먹지 않는다.

초밥도 그냥 먹고 심지어 회도 느끼함과 비릿함이

올라오기 전까지는 그냥 먹는다.

그런 감각이 느껴지더라도 예전처럼 자극적인

초장이 아닌 고추냉이 없이 간장에만 아주 조금 찍어 먹는다.

내가 소스와 함께 먹는 음식은 탕수육 밖에 없다.


그리고 주변 사람에게도 내 이론을 설파하면서

나처럼 먹으라고 설득한다.

"소스를 찍는 순간 그 음식은 소스맛이 되는 거야!"


어렸을 때와는 달리 요즘은 미국산, 호주산 소고기가

많아져서 가격부담이 그때보단 덜해졌다.

물론 한우는 아직도 부담스럽다.

대식가인 나는 그래서 친구들과 고기를 먹으러 가면

일부러 내가 식당을 정한다.

내가 발품 팔아 수집한 괜찮은

'소고기 무한리필집' 아니면 '소 한 마리 식당' 이런 곳에 간다.


잘 찾아보면 서울시내에도 적당한 가격에

퀄리티 나쁘지 않은 소고기를 먹을 수 있는 식당들이 많이 있다.


이런 소고기 식당을 선호하는 다른 이유도 있다.

바로 굽는 방식 때문이다.

나는 나보다 윗사람과 돼지고기를 먹으러 가도 당당하게 얘기한다.

"제가 정말 고기를 못 굽습니다. 그 점 양해해 주세요"

그러면 대부분 상대방이 굽는다.

대신에 나는 다른 허드렛일을 하거나 내가 사거나 한다.

그 정도로 난 먹을 줄만 알지 구울줄 모른다.


하지만 소고기는 다르다.

소고기는 예부터 '핏기만 사라지면 먹어도 돼'라는 말이 있다.

아울러 소고기는 선호하는 굽기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핏기가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

바싹 구운 걸 좋아하는 사람, 미디엄 파 등등.


소고기는 아주 굽기 쉽다.

나 같은 사람들은 핏기만 사라지면 바로 먹는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바로바로 접시에 올려주고,

아닌 사람은 마냥 기다리다가 한 번만 뒤집어주면 된다.


돼지고기처럼 '이거 익었나? 언제 뒤집어야 하나'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소고기 식당에 가면 내가 굽는 걸 자처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굉장히 고마워한다. 다 나만의 생활 속 비법이다.


예전 개그콘서트에서 파생된

"소고기 사 묵겠지"라는 유행어가 있다.

그 코너를 보면 어떤 좋은 일이 생기면

반드시 소고기를 사 먹을 것이다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만큼 소고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특별한 날,

기념하고픈 날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나도 정말 의미 있는 날에는

지갑 걱정 날려버리고 소고기를 사고 싶다.

우리 조카 초등학교 입학할 때

난 왕십리 소고기집에 데리고 갈 것이다.

그리고 내 이름으로 된 책이 나오면

아내와 한강을 바라보며 스테이크를 썰 것이다.

소고기 사 먹을 만큼 행복한 날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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