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잔해도 좋은 날이잖아

by 레지널드

체질적으로 술을 잘 못 마신다.

소주로 계산하면 3-4잔 정도,

맥주는 500cc로 두 잔 정도가 딱 적당하다.

와인도 한두 잔이 가장 기분 좋다.


물론 더 마시라면 마실 수 있지만 건강이 상한 게 확 체감된다.

소주 세 잔 마실 때까지는 괜찮았던 얼굴이

그 후로 급격하게 달궈진다.

그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하얗게 된다.

그러면 그때부터 더 마시는데,

나 같은 사람들이 가장 위험한, 알코올에 취약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 이상은 절대 안 마신다.


그런데, 술을 싫어해서 안 마시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못 마셔서 못 마시다 보니

가끔씩 술생각이 정말 간절한 날이 찾아온다.


찬바람이 부는 늦가을과 겨울,

국밥집에 가면 그렇게도 소주가 마시고 싶어진다.

고개를 돌려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을 보면

열 명 중 일곱은 소주를 곁들이고 있다.

그러면 나도 소주 한잔, 정말 딱 한잔이 간절하다.

한병 주문한 뒤 한, 두 잔 마시고 나가면

그건 그것대로 돈이 아깝다.

아내는 아예 못 마시는 사람이라 둘이 가도 마찬가지다.


우리 엄마는 명절 때 항상 전을 부친다. 그것도 엄청 많이.

우리 집은 큰 집도 아니고 제사도 지내지 않고

오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누나 내외뿐인데도 엄청 많이 한다.

결혼 전에는 부족한 실력이지만 그래도 엄마를 도와드렸다.

그때도 마찬가지로 막걸리 한잔하고 싶다

생각이 온 머리를 지배한다.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전 부치면서

막걸리 몇 병은 기본이고 소주도 많이 마신다는데

우리 집 식구들은 다 술을 안 좋아하다 보니

나만 인내심으로 버틴다.

이것도 '국밥집 소주'와 마찬가지로 한, 두 잔 마시고

더 못마실텐데 막걸리 사기가 아깝다.

그나마 매형이 술을 잘 마시고 좋아하는 편인데

우리 집에 올 때 항상 차를 가지고 오고,

조카가 생긴 이후로는 매형도 아예 술을 안 마시니

전 부치면서 막걸리 마시는 낭만은 말 그대로

낭만으로 간직해야 할 것 같다.


참고로 이건 우리 처가도 똑같다.

처가에는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 없다.

아니 '잘'이 아니라 마시는 사람이 아예 없다.

처가 식구들이 모인장소에서 술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가 맥주는 좀 마시는 편이라

야구장에 가면 항상 맥주 한잔은 마신다.

그런데, 여기서도 사실 나 자신과의 싸움은 이어진다.

남들은 이기면 기분 좋아서 맥주를 들이켜고,

지면 답답해서 벌컥 들이키지만

나는 그랬다가는 얼굴이 빨간 신호등이 된다.

beer-1379581_640.jpg 출처: 픽사 베이

남들이 한 모금에 50cc를 마신다면 난 20cc를 마신다.

나라고 광고에 나오는 모델들처럼

단숨에 시원하게 마시고 싶지 않겠는가.

그렇게 마셨다가는 주변사람들의 모든

안 좋은 시선(저 남자는 왜 저렇게 만취한 거야)을

받기 때문에 억제해 가며 조금씩 마신다.

그래서 무더운 여름날의 맥주 마시는 자리는

마실까 안 마실까를 고민해야 하는

'국밥에 소주, 전에 막걸리' 보다 오히려 더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


그리고 요즘 들어 더 나를 힘들게 하는 게 생겼으니

그건 바로 '술에 관한 글'을 읽을 때다.


잘 못 마신다 뿐이지 술을 좋아하는 나,

주(酒)와 관련된 글은 괜히 읽고 싶어진다.

글 잘 쓰는 사람들이 쓴 글은 확실히 다르다고 느낀 게

글을 읽을수록 내가 정말

그 술자리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떤 작가가 도쿄의 철교 밑 허름한 선술집에서

맥주를 마신 경험을 쓴 글을 본 적이 있다.

글을 읽는 내내 그 진한 라멘 국물과 맥주의 청량감,

심지어 그 위를 지나가는

지하철의 소리와 땅의 울림까지 고스란히 전달됐다.

다른 작가가 쓴 '몰타에서의 한 달 살기'글을 봤을 땐

그 지역의 따뜻한 햇살과 해풍을 느낄 수 있었고

와이너리에 보관된 오크통의 향까지 나는 듯했다.

와인은 한잔 마시고 보관해도 되니, 그날은 바로 와인을 한잔 마셨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술 한잔 마시고 싶은 날들이 참으로 많다.

술 잘 마시는 사람이 가끔은 부러운 게 이런 점이다.

술이 함께 해야 더 배가 되는

낭만들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도 얼굴 빨개지지 않고 딱 소주 한 병,

와인 한 병만 마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


'대식가인 내가 술까지 잘 마시면 나는 비만을 비롯한 각종 성인병을 다 달고 살았을지도 몰라.

내가 술을 못 마시는 건 어쩌면 하늘의 계획일지도 몰라'


이렇게 위안을 삼아야지.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술 한잔이 간절해졌다.

저녁에 맥주 한 캔을 마실지, 와인 한잔 마실지 고민 좀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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