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플 때만 찾아서 미안해

죽, 참으로 고마운 녀석

by 레지널드

며칠 전 야심한 새벽, 복통을 느껴 잠에서 깼다.

시계를 보니 1시 즈음이었다.

전날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서부터 좋지 않던 속이

결국 탈이 난 것이었다.


하루 종일 시름시름 앓았다.

참 신기한 게 그런 상황에서도

뭔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다.


아내에게 죽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아내가 해주는 죽은 특별한 레시피가 있거나 하지는 않다.

특히나 이번처럼 속이 안 좋아서 먹는 죽은

더욱더 아무것도 넣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아플 때 먹는 죽은 어쩜 그리 맛있는지 모르겠다.

평소 같았으면 생각 안나는 메뉴인 죽.

그런데 아프면 귀신같이 이 메뉴부터 생각이 난다.


어렸을 적 내가 가장 좋아하는 죽은 팥죽이었다.

이유는 지금생각해 보면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팥죽을 보고 초콜릿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슈퍼에서 파는 인스턴트 죽 사진만 보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조르고 졸라서 먹은 팥죽,

초콜릿인 줄 알고 한입 넣었는데

아니라서 크게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희한하게 내가 생각했던

맛이 아니었음에도 잘 먹었다.

아마 달콤 쌉싸름한 그 맛이 내 입에 맞았나 보다.

누나는 호박죽을 좋아했다.

엄마는 그래서 종종 호박죽을 해줬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속으로

'누나가 좋아하는 것만 해주네. 이건 차별이야'

라고 생각했다.

커서 알았다. 누나가 좋아해서 해줬다기보다는

엄마 본인이 좋아해서 했었다는 걸.

엄마도 호박죽을 참 좋아한다.

호박죽은 내 입맛엔 너무 달다.

다른 데 가서 먹어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호박죽은 죽, 식사 개념보다는

디저트 같은 느낌이었다.

Dakjuk.jpg 출처: 위키 백과

어른이 되고나서부터는 팥죽을 즐기진 않는다.

팥죽을 먹으면 특유의 신물이 올라오는데 그게 싫었다.

예나 지금이나 좋아하는 죽은 닭죽이다.

닭백숙을 한 뒤 그 국물을 이용해 죽을 해 먹어도 맛있고

아니면 처음부터 닭고기를 찢어서 넣은 죽도 맛있다.

생각해 보니까 학교 급식으로도,

군대 급식에서도 닭죽은 종종 나왔었는데

그 많은 인원들의 죽을 어떻게 했는지 의문이다.

눌어붙지 않게 계속 저어가며 했었을 텐데

엄청 수고로웠겠다는 생각이 든다.

죽은 정말 정성이 담긴 요리라는 게 맞는 말이다.


반대로 어렸을 땐 별로였으나

어른이 되어 좋아진 죽도 있다.

바로 야채죽전복 내장죽.

야채죽은 말 그대로 야채가 들어있어서 싫어했다.

그런데 어른이 되니,

특히 아파서 죽을 먹게 될 때는 이만한 게 없다.

닭죽이나 전복 내장죽 같은 경우엔 몸살감기용이다.

장염, 위염 등 기타 복통과 관련된 질환일 때는

못 먹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야채죽은 다르다.

어떤 질병에 걸려도 먹을 수 있다. 맛도 깔끔하니 좋다.

야채육수가 고기 육수만큼 맛있을 수 있다는 걸

야채죽을 통해 알았다.

Korean_abalone_porridge-Jeonbokjuk-01A.jpg 출처: 위키 백과

전복 내장 죽은 20대 초반에 처음 먹어봤다.

구하기 힘든 재료로 만드니까 비싼 건 이해했지만,

내 입맛에는 조금 비릿함이 느껴졌고 비주얼도 좋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다 한두 번씩 먹다 보니까

그 비릿함이 진한 맛으로 다가왔다.

삼계탕 같은 보양식 이상으로 먹고 나면

원기회복이 된 기분을 느낀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프랜차이즈 죽 전문점.

처음 오픈했을 때 나는 과연 그게 성공할지 의문이었다.

좁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그랬던 내가 가끔은 배달도 해서 먹을 만큼

업계는 커졌고 죽의 종류 또한 다양해지고 고급화되고 있다.

다양성의 정점을 찍은 메뉴는

아마 짬뽕죽이 아닐까 싶다.

원래 죽은 속을 부드럽게 달래기 위한 목적으로

먹는 게 오래된 관념이었는데

그것과는 전혀 상반된 짬뽕과 콜라보 한

제품이 나온 게 참 신기했다.


또한 죽은 비싼 음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비싼 죽이라고 해봤자 전복, 전복내장죽 정도였는데

요즘은 영덕 대게 죽도 있고

트러플을 넣은 죽도 있다고 하니

죽을 단순히 저렴한, 싼값에 먹을 수 있는

메뉴라고 치부할 순 없겠다.


서양사람들이 감기에 걸리면 치킨수프를 떠올린다고 한다.

우리나라사람들에겐 그런 음식이 죽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올해는 죽 먹을 만큼의 잔병치레를 두 번이나 했다.

그때마다 죽의 위력을 새삼 느껴서

이제는 안 아프더라도 종종 먹어볼 생각이다.


당장에 이번 달에 있는 동지에는

오랜만에 팥죽 한 그릇 사서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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