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항암 끝나면 제주 여행 한번 가자”
바로 아래 여동생은 지금 대장암 투병 중이다. 힘든 시기를 견디는 동생을 응원하며 우리 세 자매는 약속했다. 셋은 같이 나이 들어가면서 더 친밀해진 것 같다. 드디어 힘든 항암을 다하고 우린 약속대로 제주로 향했다.
공항은 벌써 단체 졸업여행 학생들로 북적였다. 우리도 저런 에너지 넘치던 때가 있었지. 그저 친구들이 좋아 하하 호호. 셋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이런저런 건강 걱정이 우선인 세월을 지나고 있다. 그래도 일상을 떠나는 여행은 언제나 설렌다.
제주에서만 맛볼 수 있는 고사리 해장국 한 그릇 뚝딱 하고, 무지개 해안 도로를 지나 이호태우 해수욕장에 주차했다. 암 발병 이후 동생은 맨발 걷기 전도사가 다 되었다. 우린 맨발로 하얀 모래 바닷길을 걸었다. 아직 차가운 바닷물은 그동안의 수고로움을 위로하듯 살짝 다가와 발을 간지럽히다 또 밀려가며 시원한 위로를 무한 반복해 준다.
발가락으로 가위, 바위, 보 놀이는 우리가 자란 거제 고향 바닷가 어딘가에서 놀던 유년 시절을 끄집어 올린다. 그 시절 여름이면 셋은 바닷가 조개잡이에 한창이었다. 뙤약볕이 등에서 불을 내어도 조개잡이 하느라 모래밭을 헤집고 다녔다. 그러다 더우면 첨벙 바다로 들어가 더위를 식히기도 했다.
서귀포시 안덕면에 있는 산방산 탄산 온천에서 피로를 풀어 보기로 했다. 탄산수가 나오는 온천엔 이미 많은 이들이 온천을 즐기고 있다. 처음 보는 중년의 여자는 대뜸 말을 건넨다 “어제도 오고 오늘도 왔어요.” 제주 올 때는 꼭 온천을 즐긴다며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불그레한 그녀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동생들은 목욕 관리사의 도움으로 때를 밀자고 했다. 난생처음으로 관리사의 도움을 받았다. 얼마나 시원한지 여행기를 쓰고 있는 지금도 여행 중 최고 순간으로 기억된다. 작은 사치는 나에게 신세계였다.
이런 생각도 잠시, 동생의 오른쪽 가슴 위에는 동전 크기의 항암 맞기 전 삽입하는 중심정맥관인 케모포트가 아직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기도로 숨죽이며 도울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었다. 그래도 동생은 별명인 ‘박장군’답게 잘 이겨 내고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온천을 뒤로하고 숙소에 도착했고 하루 찍은 사진을 보며 잘 나온 사진 고르는 재미에 빠졌다. 이 호텔의 조식은 가성비 좋은 맛집이다. 여행 중 먹는 조식은 어떤 음식인가 보다는 남이 차려주는 밥상을 받는 것에 더 의미 있고 신나는 일이다. 만족한 아침을 먹고 최남단 마라도로 가기 위해 ‘송악산 항 여객터미널’로 향했다.
여객선은 하얀 거품을 쉼 없이 내쉬며 내달렸다. 여객선 위에서 평생 고등어잡이 배를 타신 아버지 생각이 연결고리처럼 따라왔다. 뱃길을 달려 중간쯤 가다 보니 작은 섬 가파도가 편안히 바다에 떡하니 누워있다.
가파도를 지나 마라도 선착장에 도착했다. 까만 화산석 사이로 가파른 계단에 올라서니 멋진 풍경보다 먼저 오징어 굽는 냄새가 침샘을 자극한다. 우린 약속이라도 한 듯 오징어 굽는 할아버지 앞에 섰다. 한 마리 구워달라 주문하고 누가 더 이쁘냐고 너스레를 떨었다. 할아버지는 코가 닮아 자매들임을 당장 알아봤다 하신다. 우리들의 이 멋진 코는 돌아가신 아버지 작품이다.
한가지 마음 아린 것이 있다. 몇 해 전 아버지 돌아가시고 홀로 되신 친정엄마는 늘 우리들의 걱정이다. 여든다섯 해를 지나고 계신 엄마에게 차마 동생의 소식을 말하지 못해 아직도 엄마는 동생의 상황을 모르신다. 항암치료 중 힘들 때 엄마의 위로와 간곡한 기도 부탁도 못 했다. 얼마나 엄마의 위로를 받고 싶었을까. 참 아프고 미안하다.
동생은 핼쑥해진 얼굴로 가끔 엄마를 만날 땐 다이어트 중이라 했다. 평소 건강한 체격이라 엄마도 눈치를 못 채신다. 언젠가 더 건강해진 후에 ‘그땐 그랬어요’라 말해야 하는 걸까. 라는 생각도 맴돌았지만 잠시 뒤로 미룬다.
따사로운 햇살에 묻어오는 바람 덕분에 긴 숨을 아낌없이 쉬어 본다. 잘근거리며 씹는 오징어 때문인지 우린 조용히 걷기만 했다. 천천히 걸으며 스치는 바람 소리와 찰싹거리는 파도 소리의 하모니에 우리의 걸음을 얹혀본다. 마라도 가면 다들 먹는다는 짜장면은 생각보다 별로였지만 함께 먹는다는 것이 부족한 맛을 대신했다.
힘든 치료 과정을 다 마친 동생과 이곳에서 두 발로 걸으며, 먹고 싶은 것 먹으며, 두 눈으로 수평선을 바라보고, 피부에 와 닿는 바람의 숨결을 느끼는 것 모두 다 감사하다. 지금처럼 이제 몸과 영혼을 잘 관리하고 서로 사랑하며 나누며 살기로 살짝 마음먹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