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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여자 Oct 28. 2022

관광버스가 나이트가 되는 기적

# 공무원은 만능 엔터테이너


신규들이 일을 하면서 어려움을 호소할 때마다 나는 공무원 5종 세트를 겪어보지 않았다면 감히 힘듦을 말하지 말라고 충고하곤 했었다. 이름하야 산불 진화작업, 선거 업무, 재난 근무, 축제 근무 그리고 선진지 견학 인솔이다. 선진지 견학이 뭐가 힘드냐고 묻겠지만 이는 음주가무에 능한 이가 아니라면 더없이 고역일 수밖에 없다.


봄이나 가을철, 날씨가 좀 풀린다 싶으면 농사일하는 시기를 비켜 어김없이 견학 일정이 잡힌다. 대상은 이장, 새마을지도자, 바르게 살기 위원, 적십자 회원, 노인 회원 등등. 선진지 견학이라는 제목으로 통칭되는 그날은 그간의 피로를 풀고 노고를 격려하는 자리가 된다. (물론 선진 지역을 견학한다는 명목 하에)


각종 단체들의 견학에는 상급 직원과 담당공무원이 인솔을 하기 마련인데 나는 이런 일들과 인연이 많은지 신규 때는 신규라서, 7급 때는 담당자라서, 6급 때는 담당 팀장이라서 매번 참석을 하게 되었다. 회식 일정 하나만 잡혀도 그날 종일 마음을 다잡아야 하는 사람인데, 하루를 통째로 그것도 그분들을 인솔하여 다녀오는 일은 몇 날 며칠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군청에서 사회단체 관리 업무를 맡았던 적이 있었다. 그해 '전국 새마을지도자대회'가 있어 각 읍면별 협의회장, 부녀회장을 인솔하여 1박 2일 일정으로 행사를 갈 일이 있었다. 그해의 집결장소는 강원도 평창이었다. 장소를 듣자마자 악소리가 났다. 평창이라면 가는데 적어도 5시간은 걸릴 것인데, 중간에 경유까지 하여 간다니 버스에서 견뎌야 할 시간이 어마어마한 것이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평창 골짜기에 나이트클럽 따위의 선진문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전년도에는 대구에 갔다가 성인나이트클럽까지 동행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을 겪은 바가 있기에)


전날 생수와 술, 안주거리, 간식 등을 미리 준비해놓고 당일 새벽같이 출근을 한다. 인원을 확인하고, 목적지를 향해 출발하기가 무섭게 그분들은 술을 찾으신다. 그때부터 나는 날쌘돌이가 되어 술도 대령하고, 안주거리도 나르고, 시키면 노래도 한 곡 했다가, 술도 마시는 따위의 보조 역할을 한다.


공무원이 되고 나서 보니 공무원은 업무 중 독해능력과 글쓰기 실력은 물론이요, 친화력은 기본에, 말을 하거나 설득을 하는 기술 역시 겸비하여야 하고, 업무가 종료되면 음주가무 능력까지 갖춰야 했다. 그야말로 만능 엔터테이너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음주가무 실력은 갈고닦아서 쓰일 데가 많은데 가령 이와 같이 행사를 위해 단체를 인솔하여 온 담당자의 위치일 때 더 그러하다. 나는 그래도 하면 비슷하게 따라는 갈 수 있는 사람인데 대체로, 여러 때 그렇게 하기가 싫은 사람이다. 그래서 항상 꾸역꾸역 흉내만 낸다.


그래도 버스에서 가는 시간만 견디면 된다는 생각으로 내게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고 그분들은 지치지도 않았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오고 가던 술은 먹는 것이 반, 흐르는 것이 반이었다. 그럼에도 농사일하며 다진 체력이라 흔들리는 관광버스 안에서 한 손에는 술을, 한 손에는 안주를 들고도 균형 잡힌 댄스 실력을 발휘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나는 가끔 이런 광경을 지켜볼 때마다 굳이 이렇게 먼 곳까지 이동을 하면서 견학(또는 행사)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버스 안에서 즐기는 것이 목적인 바에야 그냥 경치 좋은 바다 앞에 관광버스 세워놓고 하루 종일 마시고, 놀고 하다 돌아오는 것이 더 낫지 않나 뭐 이런 생각이. (결국 이동하는 동안 활동하시던 분들은 목적지에 도착하면 힘들어서 주무시곤 하시니까)


기나긴 시간이 지나 저녁 무렵 평창에 도착을 했고, 저녁식사 후 그분들은 2차를 가지 못하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조금 큰 방에 둘러앉아 조촐한 모임을 가졌다. 나는 또 담당자 모드가 발동하여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드리기 위해 생목으로 노래도 불렀다. 얼마 후 정도면 도리는 한 거겠지 라는 심정으로 숙소에서 잠시 쉬려는 찰나 이 분들이 또 나를 찾는 것이 아닌가.

 

그랬다. 그렇게 끝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은 나의 오산이었다. 나이트가 없으면 어떠랴. 우리에겐 관광버스가 있었던 것이다!! 관광버스엔 사이키 조명이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고, 거기에서 그분들은 평창의 밤을 불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평창의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업무를 하다 보면 각종 행사를 할 때 단체 회원분들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대체로 이분들과 돈독하게 지내며 우정 비슷한 것도 쌓는다. 단지 워낙 미천한 몸인지라 해의 로를 푸는 자리에 참석만 했지 더 빛낼 없어 항상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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