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진상 고객님

# 자기 효능감은 어디에서 살 수 있나요?

by 골방여자



아이의 문제는 거리를 두고 보거나 지나고 보면 사소한 일인데, 막상 또 그 상황이 닥치면 사소한 일이 되지 않는다. 요즘 아이가 좀 괜찮아졌는지 묻는 사람이 있는데 그럴 때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 보면 또 딱히 크게 문제는 없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학교는 늦지만 가고 있고, 그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그 외 어려움이라 하면 순간순간 겪는 나의 답답함인데 그 정도로 문제라 할 수 있나 라는 생각에 이르면 '많이 괜찮아졌다'라고 답하곤 한다. 그런데 그런 대답이 무색하게 막상 또 그 상황에 놓이면 나는 내 대답을 되돌리고 싶을 정도로 답답함을 느낀다.


오늘도 월요일이고, 역시나 학교를 일찍 갈 마음이 크게 없다. 물론 어젯밤까지만 해도 일찍 갈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었는데, 아이의 마음은 아침마다 리셋이 된다. 어젯밤의 그 각오는 온데간데없고 지금은 그냥 피곤하고, 더 자고 싶은 마음이 전부이다. 그래서 잔다. 학교 가서 겪어야 하는 불편한 마음을 회피하기 위해서. 내 눈만 가리면 숨겨진 줄 아는 아이의 숨바꼭질과 비슷하다.


예전에 '메멘토'라는 영화를 본 적 있는데, 자고 일어나면 이전의 모든 기억을 잃는 남자가 나왔다. 이 남자는 기억을 부여잡기 위해 몸에 메모를 새겨보기도 하지만 다음날이 되면 다시 기억을 잃고 고통스러워했다. 아이의 모습이 딱 메멘토다. 하루가 지나면 어제의 다짐, 각오는 다 잊고 새로운 날이 시작된다.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피곤과 무기력과 귀찮음, 그리고 저녁이 되면 반성과 후회와 다짐 같은 것들. 그리고 또 아침이 되어 피곤과 무기력과 귀찮음이 찾아오는 날의 연속이다.


아이는 머리를 감고 드라이를 할 때면, 드라이기를 어딘가 걸쳐놓고 마치 히터 바람을 쐬듯 30분이고 40분이고 켜놓는다. (그리고 그 시간은 이미 등교에 늦은 11시다.) 이는 머리를 말리는 것보다 따스한 바람을 느끼고 싶다는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 알람 소리도 묵살하고 계속 잘 수 있을 만큼 청각 주의력이 떨어져선지 드라이기의 소리는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소리에 예민한 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분노 게이지가 오른다. 드라이기를 좀 끄란 말에 알겠다고, 지금 끄겠다며 또 그 상태로 10분이 흐른다. 체감상 한 시간은 드라이기가 돌아가는 것 같다. 결국 크게 화를 내고서야 드라이기는 꺼진다. 내가 화가 많은 건지, 아이가 화를 내야 움직이도록 학습이 된 것인지 모르겠다.


직장을 다닐 때에도 수많은 '진상'이라 일컬어지는 민원인이 있었다. 그분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대개 고구마 백개는 먹은 듯 답답한 마음이 차오른다. 공통적으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설득될 마음이 없고, 곧 죽어도 내가 맞다고 주장하는 면이 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면 내 말이 먹혀야 하는데, 아무리 말해도 들을 생각이 없구나 하는 느낌이 들면 머릿속이 하얘진다.


하지만 이런 민원인은 대개 두 부류로 나뉘는데 사소한 것에서 마음이 상한 경우이거나, 원래 말이 좀 통하지 않는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는 최대한 마음을 어루만져 잘못을 시인하고, 민원인의 호소를 진심으로 들어주는 태도로 가끔 해결이 되곤 한다. 아. 선생님(또는 어머님, 아버님) 드라이기 때문에 속상하셨군요. (그럼 보통 내가 당신을 가르친 적이 없는데 왜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냐며 또 화를 내신다.) 이런 나쁜 드라이기 같으니라고. 선생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겠습니다. 드라이기가 백번 잘못했죠. 그러니 마음 푸시고 좀 이해해 주세요. 선생님 목소리 들어보니 마음도 넓으실 거 같은데. 라고 읍소를 하다 보면 가끔 해결이 되곤 한다.


하지만 원래 말이 잘 통하지 않는 후자의 경우에는 드라이기를 오래 켜놓는 경우의 전력 손실, 고장이 날 확률, 옆집 소음 피해 정도 등에 대해 공신력 있는 기관의 답변을 받아 회신을 해주는 방법으로 위기를 벗어난다. 이런 분들은 내가 하는 말은 들을 생각이 없으므로 기관의 권위를 빌려 객관적인 사실 확인을 통해 불신을 차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더 오래 경험한 우리 집 고객님은 당체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다. 감정의 호소도, 사실관계를 알려주는 것도 통하지 않는다. 남이 아니라서인가, 일이 아니라서인가 민원인을 대할 때처럼 차분하게, 냉정하게 대처가 되지 않는다. 우리 집 드라이기는 어느 날 터질지도 모른다. 그럼 그때야 '아. 오래 켜놓으면 안 되겠구나' 스스로 깨닫게 될지도.




최근 들어 아이가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인지 조금 파악이 되었다. 가뜩이나 충동성과 불안이 높은 아이는 어떤 불편한 감정이나, 불편한 상황을 "이겨내는 힘, 견뎌내는 힘"이 부족하다. 가진 에너지가 작아 많은 일정을 소화해 낼 수 없는데, 일정이 많아지면 갑작스레 취소를 하거나 미루는 경우가 많아졌다. 나는 해낼 수 없다고 마음이 먼저 지쳐 물러나는 것 같고, 그런 마음이 들면 어떤 말로 설득을 하고, 감정에 호소를 해도 그 마음을 물리지 않는다. 나는 못한다며 나가떨어진다.


그런 일정들은 학교, 치과 방문에 과외가 더해지는 정도의 일정인데, 힘들어도 참는 연습을 좀 해보자는 나의 말은 엄마는 나의 힘듦을 이해하지 못해라는 감정으로 치환되곤 한다.


초등학교 시기에 adhd(대체로 adhd와 우울, 불안은 친구이다)를 알게 되었다면 약 이외에 행동을 개선할 수 있는 다른 개입을 해보겠지만 청소년기에 발견하게 되면 약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지금에 와서 사회화 훈련이나 행동 개선 치료를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미 형성되어 굳어진 상태이므로. (그래서 나는 늘 아이를 가진 부모들이 좀 더 "일찍" 알아채기를 바란다.)


지금은 adhd약에 우울과 불안을 조절하는 약을 함께 처방받아 먹고 있다. 병원에 들러 선생님께 아이의 최근 근황들을 알리며 '선생님 아이가 견디는 힘을 갖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질문해 보았으나 선생님도 '대체로 크면서 나아지는 경우가 많고, 이제는 좀 나아질 때도 되었는데, 조금 더 기다려 보자, 현재로서는 뾰족한 수가 없다'라는 답밖에 할 수가 없다.


무한한 칭찬과 사소한 성공 경험을 통해 자기 효능감을 높여야 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머리가 굵어진 아이에게 이미 바닥이 난 자존감은 뛰어오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마음의 힘을 얻는 방법이 시간밖에 없다니. 답답하지만 기다리는 수밖에.



# 그림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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