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안에 잠자는 거인 깨우기
# 하던 대로 하지 않기
최근 다시 퇴행과 같은 상황이 왔다. 그나마 늦더라도 오전 중엔 학교를 갔었는데 연이은 결석이 또 시작된 것이다. 어렴풋이 이유를 짐작해 보자면 마지막 고삐같이 부여잡고 있던 기말고사가 끝나고 마음을 놓아버린 것 같았다. 기말고사까지 기를 쓰고 버티다가 마음이 툭 끊어진 것이다.
'교복을 입어라, 알겠다, 언제 입냐, 곧 입겠다, 학교 안 갈 거냐, 갈 거다, 언제 갈 거냐, 곧 갈 거다'라는 말을 수백 번 주고받으며 교복을 입네 마네 소모적 다툼을 하는 동안 우리보다 먼저 지친 해가 까무룩 떨어지곤 했다. 오후쯤 서로가 서로를 포기하기에 이르러서야 정적이 찾아온다. 반나절 동안 서로에게 내뱉은 열기가 식지 않아 집은 찜솥같이 달아오르고, 그 속에 가슴 한편 상처를 안은 여린 영혼 둘이 몸을 누이고 있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외부적인 도움으로 나아졌던 때도 있었다. 약물의 도움으로 감정적 충동성은 많이 조절이 되었었다. 그리고 본인도 느껴질 만큼 가끔 집중이 잘 되는 느낌도 든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하는 일들에 관심이 생겼다. 전에는 옆에서 뭘 해도 관심도 없고, 남의 일이었는데 이제는 우리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귀를 기울이고, 신경을 쓴다. 다만, 그 단계를 넘어 어떤 것을 "해내는 것"은 아이의 의지에 더 좌우되는 것이라서 이런 역할까지 약에 기대할 순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상담을 통해 잠시 의지가 생긴 적도 있었다. 어렵사리 성사된 상담 선생님과의 만남은 의외로 아이의 마음을 움직였고, 연륜 있는 상담사는 과묵하던 아이를 수다쟁이로 만들었다. 무기력하던 아이를 일으켜 운동을 하게 했고, 잠시나마 아이는 생기를 찾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분은 일정 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정기적인 주기로 상담을 희망하는 나의 작은 바람을 충족시키지 못했고, 본인의 개인 일정 때문에 다른 초짜 상담사로 변경하기도 하고, 한 달 또는 두 달이 가도록 상담일자를 잡지 않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외부 강연이나 외부 행사에 비중을 두는 것 같았고, 본인이 소화하기에 과도한 스케줄임에도 꾸역꾸역 하다 보니 우리 아이의 상담은 저 어딘가로 밀려나 한 번씩 생각나면 부르는 꼴이 되었다. 능숙하고 노련한 상담기술과 달리 일처리에 불신이 쌓이다 보니 지금은 나도 반은 포기한 마음이 되었고, 겨우 내었던 아이의 마음까지 돌아서려 한다. 그간 쌓인 아이에 관한 정보와 상담자와의 라포 때문에 꾹 참아왔지만 갈수록 내 돈 주고 하면서 이런 고민까지 껴안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이유로 다른 상담센터를 알아봤는데 중학교 3학년씩이나 된, 이미 머리가 굵어질 대로 굵어진 아이를 학교에 잘 가도록 만드는 일은 어렵다고 판단되었는지 그냥 하던 상담사와 계속하는 것이 낫지 않냐며 우회적인 거절을 표했다.
혹여나 위클래스를 통해서 학교에서라도 어떻게 아이의 마음을 다잡을 수 없을까 하여 학교를 통해 지원을 요청했으나 '이것은 내 의지의 문제요, 나 혼자의 힘으로 충분히 극복 가능하다, 상담의 도움이 필요치 않다'는 아이의 말에 학교에서도 금방 수긍을 해버렸다.
역시나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아이와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아이다. 아이는 어미인 나를 참 좋아한다. 중학생임에도 일어나자마자 엄마에게 안기고, 게임을 하는 중간중간 엄마에게 장난을 건다. 내 곁에서 안도하고 안정감을 느끼는 아이다. 그런데 주말을 이렇게 지내다가 월요일이 시작되면 다시 우리는 적으로 돌아선다. 어제의 그 다정함은 온데간데없고, 당장에 마주한 어려움 앞에서 우린 감정의 바닥을 보이고 만다.
하루에도 몇 번씩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불편한 감정을 공유했고, 이는 내 휴직기간 어떻게든 아이를 정상궤도로 올려놓고 말겠다는 다짐과 초조가 더해져 갈수록 감정의 간극만 커졌다.
이러다가 그나마 미약하게 유지하고 있는 아이와의 관계까지 무너질 것 같았다. 그즈음은 과연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계속 들던 참이었다. 윽박질러 아이를 학교에 내모는 방법으로 겨우 하루를 버티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회의감이 더해가던 어는 날 나는 '무기력의 비밀'이라는 책을 읽었다.
내 아이의 그것은 의존적인 성향, 미흡한 사회성, adhd로 인해 그간 무너진 자존감, 학습의 어려움으로 인한 좌절 등으로 인해 나타난 무기력이었고 특히, 어려운 일을 겪어내는 내면의 힘을 키워내지 못해 스트레스에 더 취약성을 보이는 것이었다.
무기력한 채 지내지 않으려면 무엇이든 해야 하는데, 무기력한 아이들은 무엇을 해야 할 때의 고통을 감당할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처음부터 포기하고 포기한 이후에는 회피하거나 도주함으로써 포기를 지속시킨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을 남들에게 확인시키기 위해 굳이 자신을 무능한 사람으로 인식하도록 계속 무기력한 상태로 지낸다. 차라리 기대를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내보이는 것이 낫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무기력의 비밀, 김현수>
게으르다, 나태하다, 사악하다, 연약하다고 이해하는 관점을 전환하는 태도가 필요하고, 기존과는 다른 방식, 역설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했다. 즉, 아이들에게 잘해 주는 것. 혼날 것을 준비하고 있거나 무가치한 취급을 받을 태세가 되어 있는 아이들에게 의외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예상을 뒤엎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지금까지의 방법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면, "이제까지 했던 방법을 안 해보기"로 했다.
반복하던 잔소리를 멈추고, 진심 어린 걱정을 표현하고, 잘해주는 것이다. 나의 기준에서 생각하고, 언제나 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함을 탓할 것이 아니라 아이의 입장에서 이해해 보고, 사소한 노력도 인정해 주는 것.
학교는 늦더라도 가는 방향으로 아이에게 맞췄다. 아침 일찍 억지로 깨운대도 결국 가는 시간은 늦어지고(또는 가지 않게 되므로) 쉽게 잠들지 못하고, 아침에 깨는 것이 쉽지 않다는 아이의 상태를 이해해서 충분히 수면을 취한 후 9시경 깨워보기로 했다. 아이도 교복을 먼저 입고 아침밥을 먹는 루틴에 협조해 주었다. 일이 더디게 진행되더라도 학교 가려는 마음을 의심하지 않았고, 차라리 그동안 다른 집안일을 하며 조금 기다려주었다. 나서기 전 충전의 시간을 인정해 주었고, 가벼운 농담을 하며 집을 나설 수 있도록 애를 썼다.
차를 타고 가면서 지난밤 월드컵 이야기를 하고, 거리에 세워진 트리 이야기를 하고, 김장 이야기를 한다. 아이는 늦은 시간이지만 학교를 간다. 이렇게 나서는 일에도 많은 용기가 필요했음을 인정하고, 늦더라도 가는 것만으로도 많이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해 본다.
다른 마음으로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여리고 작은 아이가 있었다. 쉽게 상처받고, 쉽게 마음이 닫히는 아이, 마음속에 잠자는 거인이 있는 줄도 모르고 한없이 웅크린 아이.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모르지만, 나는 그러는 동안 아주 여러 번 앞서려는 마음 앞에서 동동거리겠지만,
이제 아이 안에 잠자는 거인을 깨워볼 생각이다. (아. 너무 비장한 어투로 읽지는 않길 바란다.)
# 그림 출처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