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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여자 Dec 29. 2022

법 없이 살던 내가 소송이라니

# 글을 쓴다는 것


나는 말보다는 글이 편한 사람이었다.

서론, 본론을 지나 결론에 이르는 빌드업식 글 속에서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에 이르기까지의 겸연쩍음, 망설임, 고민 따위를 행간에 녹일 수 있는 글 말이다. 말은 빠르고 금세 사라진다. 마주 보고 충분한 교감을 하기도 전에 주제는 저 멀리 백 미터 달리기를 하고 있고, 뒤쳐진 그곳에 언제나 흘린 말들을 주워 담고 있는 내가 있었다.


그에 반해 글은 때로 내가 풀어놓는 것보다 더 많은 의미를 포함하여 전달되기도 했다. 꾹꾹 눌러쓴 볼펜심의 농도, 기분에 따라 각도를 달리하는 글씨체의 기울기, 거기에 한 줄 여백이라도 있어 읽는 이의 숨까지 고르게 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합주가 되는 것이다. 센치한 어느 날엔 흐르는 눈물에 흠칫 놀라 손등으로 훔친듯한 눈물 자국까지 편지지에 얼룩져 남아 있다면 금상첨화다.


그래서 학창 시절에는 편지를 썼다. 친구에게 말하기 어려우나 꼭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써서 주고받았다. 마침 초등학교 6학년 때 단발머리에 얄상한 외모로 낭만을 온몸으로 표출하던 우리 담임 선생님은 어느 날 빨간색 우편함 하나를 교실벽에 걸어주었다. '우정의 편지함'이라 명명하면서. 우리는 서툴고 여린 마음을 고이 접어 우편함에 걸어두었다. 글이 길어질 때마다 글길을 타고 유영하던 마음이 한 씩 자라났다.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나를 더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나와 감성지수가 비슷한 이를 만나게 되면 반가운 나머지 손이라도 덥석 잡고 편지를 건네고 싶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가벼운 것은 말로 하고, 중요하고 무거운 것만 글로 쓰던 것이 어느덧 바쁜 일상을 살아내고 뒤돌아 보니 이제는 가벼운 말만 남았다.   




그런 나에게 글로 인한 시련이 찾아왔다.  

인사발령으로 어느 날 갑자기 소송업무를 담당하게 된 것이다. 우리 일이란 것이 어느 날 인사발령이 나면 그 날로 그 자리에 가서 무조건 해내야 한다. 그간 다양한 업무를 해왔었지만 그런 일들은 그래도 일반적인 사고로 해석이 가능하고, 일상적인 용어를 쓰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제까지 법 없이도 살던 내게 갑자기 소송이라니.  


내 업무는 우리 기관이나 기관의 장이 당사자가 되는 소송에 있어 소송을 대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즉, 기관을 대리한 변호사의 역할이라 생각하면 된다. 나의 전임자는 법을 전공하였고, 이 업무를 5년 정도 경험했던지라 베테랑이 되어 있었는데 생초짜인 내가 그 뒤를 이어 무리 없이 이 일을 수행해야 한다니 부담이 밀려왔다.


일단 사건 폴더 하나를 꺼내 판결문을 펴놓고 수없이 읽어보았다. 원고, 피고부터 헷갈리는 내게 판결문의 내용은 외계어나 다름없었다. '그렇지 아니하지 않았음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따위의 문장들은 한글이지만 한글이 아니었다. 한글을 읽으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이것이 승소했다는 것인지, 패소했다는 것인지 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내가 하는 일은 소장이 접수되면 답변서나 준비서면을 작성하여 제출하고, 변론기일에 법원에 참석하는 일이었다. 실제 소송에서는 드라마에서와 같이 뛰어난 언변을 자랑하며 말로 설득해야 하는 일은 많지 않다. 모든 것은 글로 싸운다. 반박할 자료를 일목요연하게 기술하고, 입증할 증거를 붙여 글로서 설득한다.


물론 가장 큰 어려움은 답변서 또는 준비서면을 쓰는 일이었다. 이는 부서에서 1차로 제출한 초안을 바탕으로 내가 수정하여 법원에 최종 제출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송건과 관련된 업무를 먼저 완벽히 파악해야 했고, 이를 바탕으로 적법성까지 주장해야 했으므로 나는 몇 배의 노력을 해야 했다.


부서에서 제출되는 초안의 서면자료는 법원에 제출하는 자료의 형식과 맞지 않거나, 내용이 부실한 경우가 많았다. 보통의 경우 직원들은 잘 알고는 있지만,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모두 서면에 담아 기술하지 못했다. 그런 경우 서면을 다듬기 위해 직원을 닦달해야 했는데 방향을 잡지 못한 직원들은 스무고개라도 하는 듯 아주 어렵게 한 번에 하나씩만 답을 내놓아 나를 답답하게 하기도 했다.


법원에서 통용되는 글은 조금 달랐다. 일단 그들만의 용어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그런 표현들은 판결문을 보면서 익혔다. 그리고 주장을 이끌어내는 방식은 원고 측 변호사가 내놓는 서면을 보면서 형식을 빌려 작성하는 연습을 했다. 처음에 생소하고 어렵기만 했던 서면 작성도 결국은 글을 통해 누군가를 설득시키는 일이란 점에서 내가 친구에게 편지를 쓰면서 마음을 설득하고자 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진심을 다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일관성 있게 차곡차곡 주장해나가면 법원에서도 이를 존중하여 판단하였다.


대신 감정은 쏙 빼고 사실만 적시하여 마음을 전달하는 방식이어서 그 전 편지를 쓰던 시절엔 감정에 호소하던 여인의 어조였다면, 이번엔 조금 시크하고 쿨한 여인의 어조로 말해야 했다.


나는 꽤 많은 시간을 들여 서면을 작성하고 또 작성했다. 나중에는 하나의 서면을 너무 많이 읽고 퇴고하여 쳐다보기도 싫을 정도였다. 또 어떤 서면은 나의 공이 너무 아까워 나중에 꼭 소장하리라 생각했었으나 역시 일이 끝나니 뒤도 돌아보기 싫어졌다.   


그중 가장 쓰기 어려웠던 서면이 있었는데 토지의 경계를 다투는 소송이었다. 업무 자체가 어려워 이해가 잘 안 되니 소화시켜 다듬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정작 업무 담당자는 다소 소극적인 모습이어서 굳이 나 혼자 이렇게 열의를 다해야 하나 하는 회의도 들었다. 하지만 결국 최종 제출자는 나이기에 나름 법령과 지침서, 판례, 질의응답집, 논문 등을 샅샅이 뒤져 꾸역꾸역 제출을 했었는데 결국 2심까지 가서 승소로 끝이 났다.


그 당시 변론기일에 참석했다가 엘리베이터에서 원고 측 변호사와 마주쳤는데 변호사가 도대체 서면은 누가 작성한 거냐고 물었다. 나는 뭐가 잘못되었나 싶어 지레 겁을 먹고는 저......라고 수줍게 말했는데, 글이 너무 유려하다며 변호사 해도 되겠다는 농담까지 건넸다. 너무 힘겹게 끌고 가던 소송이라 그 말은 나에게 큰 용기가 되었고, 다음 서면에서 나는 좀 더 자신 있는 어조로 논리를 펼칠 수 있었다. 나에게 시련으로 다가왔던 글이 나를 치유하는 순간이었다.


글이란 것이 누군가에게 가닿아 진심을 제대로 전달하기만 한다면 어떤 형식을 빌리더라도 통하는 것이 있는 것 같다.




게으른 완벽주의자였던 나는 당체 글을 쓰지 못했었다.

잘하고 싶은데 잘하지 못할 것 같아서, 제대로 안 할 바에는 안 하는 게 낫다는 심리였다. 그래서 최대한 머릿속에서 완성되면 쏟아내자 했더니 한 편도 글이 되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브런치에 가입하고, 작가 승인을 받기로 마음 먹는데만 1년 여가 걸렸다. 자꾸 쓰고 싶은 말은 목에 차오르는데 이를 뱉어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무조건 써야 한다는 작가님들의 말을 받아들이고 지금은 이렇게 아무 글이나 써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실로 엄청난 발전이라 할 수 있다.


일단은 마음 가는 대로 계속 써볼 작정이다. 짧은 글을 쓰려면 자꾸만 글이 길어져서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는데, 이렇게 쓰면서 답을 찾아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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