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 직원 진의 카톡이 왔다. 저 두 문장이 만들어낼 수 있는 불안의 시나리오가 얼마나 많은지 진은 미처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마음이 급해서 안부를 건너뛴다.
왜? 무슨 일인데?
12월 말. 지금은 인사 시즌이고, 1월 정기인사를 앞두고 인사예고가 발표된 모양이었다. 진은 기대했던 승진대상에서 누락되었고, 이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필요해서 나를 찾았다. 순간 조금 안도가 되었다. 내가 생각했던 무수한 경우의 수 중 끝자락쯤에 위치할 만한 일이다. 전화기를 다른 손으로 바꿔 쥐고는 굽고 있던 스팸을 뒤집었다. 내가 내는 생활음이 휴대폰을 타고 전달될까 봐 조금 조심스럽게 움직여본다. 나에겐 스팸을 뒤집으며 할 수 있는 얘기지만 진은 지금 어느 누구보다 심각하다.
진은 승진이 임박한 시점 인사발령일을 이틀 앞두고 출산휴가+육아휴직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갑상선암이 발견되어 질병휴직까지 한 탓에 약 1년 6개월을 쉬게 되었다. 출산이 임박하여서도, 복직을 하여서도 쉼 없이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들어갈 때는 휴직할 직원을 승진시킬 수 없다는 이유를 들더니, 복직을 하니 휴직하고 온 직원을 승진시킬 수 없다는 이유를 들며 한참 뒤 후배를 먼저 승진시킨 것이다.
물론 그럴 수 있다. 휴직해있는 동안 다른 직원들은 꾸준히 일을 했으니 조금의 패널티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방침이 매번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즉, 휴직에 들어가는 직원을, 또는 휴직했다 복직한 직원을 곧바로 승진시킨 사례가 이전에는 있었다는 것이다. 진은 억울했다. 아직 어린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겨가며, 아픈 아이를 재워놓고 나와서 밀린 일을 해가며 애를 썼던 날들이 억울했다. 그런 울적한 마음에 빠진 진에게 '아이가 엄마의 앞길을 막았다'는 말을 한 직원이 있어 그렇지 않음을 보이기 위해 더 승진에 기를 썼다는 것이다.
진은 조금 울먹였다. 일찍 어린이집에 보내는 바람에 한 달째 감기를 달고 있는 아이도 옆에서 서럽게 운다. 아이를 낳고, 양육을 도맡을 수밖에 없는 여성의 한계인가 싶다. 진은 승진도 하고 싶지만 아이도 잘 키우고 싶었을 뿐이다. 세상의 시련 앞에 놓인 두 여인 앞에 내가 건넬 말은 많지 않았다. 그러니까. 억울하겠다. 너무한 거 아니니? 고생한 거 알지. 괜찮다. 괜찮아. 이런 몇 마디가 전부였다.
진은 내게 위로할 틈도 주지 않았다. 언젠가 네 인생도 빛날 때가 있을 거라는 말을 내가 했는지, 진이 했는지 모르겠다. 끊기 전 지금 진의 마음에는 그다지 와닿지 않을, 지나 보면 사실 별 일 아니란 말을 해주었다.
공직의 일이란 것은 잔잔하고 일상적인 일이 보통이다. 법령에 따라 절차에 맞게 진행하는 일에 있어 누군가 눈에 띄는 성과를 보이기는 쉽지 않다. 정량적 평가가 쉽지 않은 일을 두고 서열을 나누어 승진을 시키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정성적 평가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여기에 폐쇄적이고 관습적인 이 집단에서 혈연, 지연, 학연은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이곳과 아무 연고가 없는 나는 우리 아빠가 이사를 와서 못해도 이장이라도 하지 않고서는 승진에 한계가 있다며 농담을 하곤 했었다.
평가 시스템이란 것이 어떻게 설계를 하든 완벽할 순 없지만 이렇듯 정성적이고 정치적인 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시스템에서는 이를 보완할 내부 방침이 필요하다. 모두가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만한 공통의 기준말이다. 그런 방침이 단순히 바뀐 장의 철학에 따라 변경된다거나, 사정에 따라 달리 적용되는 일이 생기면 그 조직에선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
내 주변에는 유독 승진이 임박하였으나 승진을 하지 못하는 팀장님들이 많았다. 이 분들은 처음에는 자신을 자책하는 시기를 거치더니 얼마 후가 되면 하나같이 세상 모든 것에 불만을 토로했다.좀비 같이 말라가던 그들은 소소하던 오피스물을 공포물로 만들곤 했다.
위기를 이겨내 보겠다는 투지보다는 결국 소용없는 짓이라는 회의감에 손을 놓는 경우가 더 많았다. 간혹 그들은 마음의 병을 얻고 세상 근심 다 가진 표정으로 하루하루 찌들어 가기도 했는데 결국 이를 치유한 묘약은 승진케어라는 시술밖에없었다.
남들과 보폭은 맞춰야 내 삶이 부정당하지 않기에, 더 도태되지 않기에 다들 기를 쓰며 그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애를 쓴다. 나의 힘듦과 고달픔에대해타인이 제공하는 합법적 보상이라는 미명 아래 너도 나도 상처를 들이밀며 봐달라고 아우성을 친다. 이러한 때 너 자신이 알아주면 되지 따위의어설픈 조언은 금물이다.
세상 억울할 후배 진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다. 내가 고민하던 것을 후배가 그대로 할 수밖에 없어서, 결국 네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네 마음뿐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어서, 아이를 낳으라면서 그 아이는 영적인 힘으로 키울 거냐며 울부짖을 수밖에 없어서 씁쓸하고 씁쓸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