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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여자 Jan 01. 2023

보통날, 보통 이야기


마지막과 첫날을 기해 무언가를 하는 일이 나는 어색하다.

그래서 최대한 동요하지 않고 무심히 흘려보내려 애를 쓰는 편이다. 새해를 기해 특별히 장대한 목표를 잡는다거나, 안 하던 행동을 하며 나를 긴장시킨다거나. 그런 일이 결국 알려 줄 나의 무책임함을 회피하기 위해 나는 애써 그냥 한 달의 중간에 끼인 보통의 날처럼 첫날을 보낸다. 그래서 첫날부터 감기가 매달린 것도, 세척하다가 별안간 렌즈가 찢어진 것도 보통날이기에 괜찮다. 누군가 돈을 빌리러 와도 척 내줄 듯한 너그러움이다.


새 해 첫날은 할머니가 신점을 보는 날이다. 할머니는 아침 일찍 가족들의 생일과 태어난 시를 기록한 종이를 몸빼 허리춤에 넣고 신점을 보러 갔다. 미래를 점치는 일이란 추운 겨울 이불속 만화영화를 포기하고 나갈 수 있을 정도로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이었다. 나는 종종 대며 몸빼 바지의 현란한 춤사위를 따라 걸었다. 몸빼 바지는 다리춤이 둘은 들어갈 만큼 헐렁한 탓에 늘 맥없이 흔들리곤 했다. 오른쪽으로 더 기울면 나에게 행운이 오는 거라 나만의 운을 점치며 그 길을 따라 걸었다.


칠한 지 오래되지 않은 것 같은 파란색 대문이었다. 철문의 서늘함이 손잡이를 잡기도 전에 전해져 온다. 서늘한 기운이 어색하지 않을 휘황찬란한 그림과 장식들로 방이 꾸며져 있다. 그분은 쌀을 던져 그 펼쳐진 모양으로 한해를 예상했는데 도대체 쌀이 어떤 모양을 만들어 내길래 예견을 하나 궁금했던 나는 허리를 쑤욱 빼고 쳐다보곤 했다. 할머니는 우리 부모님의 운세를 본 뒤 비용의 지불 없이 손주들의 것을 곁들여 물어보곤 하셨는데 그래서인지 앞으로 장성할 상이라든지, 돈방석에 앉을 사주라든지, 펜대로 먹고 살 것이라든지 (또는 브런치 구독자가 만 명이 될 것이라든지)와 같은 거시안적인 운세보다는 차조심, 친구조심 따위의 딱 서비스만큼의 소소한 운세만 내놓았다. 어느 해는 구설수를 조심하라는 말에 이 어려운 단어의 함의는 예사롭지 않을 거라 기대했지만 역시나 차조심, 친구조심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고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언제나 세상에 궁금한 것이 많았다.

어쩌다 손님이 오시면 엄마는 받침이 세트인 커피잔에 커피를 내오곤 했다. 그런 잔은 특별한 손님이 왔을 때라기보다 오히려 보통의 주변 아줌마들이 방문하였을 때 출몰하곤 했는데 엄마는 마치 평소에도 나는 그런 고급진 잔에 커피를 마시곤 한다는 투로 행동하곤 했다. '나는 다 아는데'란 표정으로 어른들의 수다에 귀를 쫑긋하고 있으면 엄마는 행여나 내가 진실을 실토할까 두려워 얼른 내 시선을 돌리곤 했다. 그럼에도 나는 꿋꿋이 옆자리를 사수하며 어른들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듣곤 했는데, 그 이야기들은 늘 살아서 날뛰는 활어 같았다. 세상은 늘 중년 여성들의 감성이 메마르지 않도록 흥미로운 사건 사고를 만들어 제공했고, 그녀들은 마침 이를 가공하여 치정 담긴 일일연속극 한편 뚝딱 만들어낼 정도의 작가 기질이 다분했다.  


나의 세상에 대한 호기심은 오밤중에 일어나는 싸움의 현장에서 가장 빛을 발했다. 조용한 어둠을 뚫고 고성이 오가는 때 나의 엉덩이는 들썩이곤 했는데 이를 참지 못하고 현장으로 직접 나가 목격한 것이 여러 번이다. 역시 실제 현장은 살아있었다. 욕이 찰지고, 금방이라도 한대 휘갈길 것 같은 손모가지가,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가 생생하게 전해졌다.


나이가 들어 나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되 굳이 현장에 나가야 하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는 방법이 언젠가부터 책이 되었다. 하지만 책은 나에게 결핍의 상징이기도 했다. 보따리장수가 동네 젊은 처자들을 겨냥하여 동네 어귀에서 책을 팔던 날, 엄마는 큰 맘을 먹고 할부로 동화책 전집을 구입했다. 헌데 워낙 좁은 동네라 '누구네 며느리가 그 몹쓸 할부를 하였네'란 소문이 할머니 귀에 들어간 것이다. (그 당시 할부란 변제할 능력이 되지 못하는 자의 허영심 같이 비합리적인 소비방식으로 인식되던 때이다.)


할머니는 예상대로 며느리에게 볼멘소리를 했고, 그 말이 듣기 싫었던 엄마는 책의 흔적을 없애는 것으로 소리 없는 반항을 했다. 그 전집은 박스채 장롱 위에 올려진 채 몇 년이 흘렀다. 한참 뒤 엄마의 화가 누그러져 그 책들이 지상에 내려온 때에는 이미 좋은 위치를 선점한 쥐들이 곳곳을 갉아먹어 몇 년은 본 듯 낡아있었다. 그 책을 읽기엔 아이들도 이미 자라 있었으나 어미의 설움을 알았는지 우리는 효심 깊은 아들 이야기와 아아 6·25 같은 책들을 열심히 읽었다. 아빠는 이에 질 세라 큰댁에서 읽다 버리려는 책들을 갖다 주곤 하셨는데 그 책들은 누렇게 변한 세로책이었다. 세로의 열을 찾느라 헤매다 보면 성격 버리고 눈 버리는 하등 쓸모없는 책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냥 책을 산다. 어떤 날은 읽지도 않으면서 산다. 그저 쌓아두고 과거의 나에게 보상이라도 하듯 선물하곤 한다.  


그렇게 애증의 존재이던 책은 세상의 현장을 눈앞에 펼쳐주었다. 추운 겨울 이불을 박차고 나가지 않고 좀 더 성숙한 모양새로 생생한 이야기를 느낄 수 있었다. 책에서 보는 살아 움직이는 이야기는 내 삶을 보통의 이야기로 만들어주었고, 한편엔 안도감을 심어주었다. 남들이 호기심을 가질 만큼 특별한 이벤트가 없는 현재의 내 삶이, 보통으로 흐르는 내 삶이 괜찮다 위로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저 책 속에서 삶을 낚으며 보통의 날을 보낸다.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아서 좋은 날이다.  

 


# 사진 출처 : we heart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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