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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여자 Jan 13. 2023

약속을 한 INFJ 내면의 소리

# '약속'이라 적고 '내적갈등'이라 읽는다.


기분이 좋을 때 얼떨결에 약속을 했다가 막상 약속이 취소되면 더 기분이 좋아진다는 내 말에 마치 다른 별나라 종족을 보듯 하던 신랑의 표정이 생각난다. 어떻게 약속이 취소되는데 기분이 좋을 수 있냐며, 그에게 그 말은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지와 같은 인과관계를 가지기에 배가 고픈데 밥 먹기 싫은 느낌이란 것도 있음을 이해시키기 어려웠다.  


아는 언니의 연락이 왔다. 통화 끝에 한 번 보자며 다음 주 금요일이 어떠냐 한다. 언니는 방학을 맞아 쉬는 시기를 맞았고, 나는 이렇게 누군가 나서서 약속을 정하지 않으면 밥 한번 먹자를 한 해가 다 가도록 외고 있을 것을 알기에 약속을 잡는다. 하지만 언제나 얼떨결에 약속을 해놓고 나면 내면의 갈등이 시작된다. 이는 특정 누군가가 대상일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닌 그저 모든 약속 앞에 동등하게 겪는 갈등이므로 특정 누군가가 서운해할 일은 아니다. 나는 그런 면에서 꽤 일관성 있는 인간이다.


D-3

약속이 다가온다. 아. 그때 되면 몸이 아플 수도, 다른 일이 생길 수도 있겠지. 그때 가서 생각하자.


D-2

아침. 눈을 뜨다. 오늘이었나? 아. 아니지. 아직 이틀 남았군. 휴. 다행이다. 아. 그냥 취소할까? 좀 귀찮아진다.


D-1

아침. 눈을 뜨다. 오늘인가? 아. 다행히 하루나 남았다. 어디 아픈 데는 없나? 다른 바쁜 일은 없겠지? 언니는 여전히 시간이 될까? 카톡을 보냈는데 답이 없네? 약속을 잊었을까? 그냥 이참에 다음으로 미룰까? 아. 그러기엔 정당한 변명이 없다. 안된다. 언젠가 한 번은 만나야 한다. 받아들이자.  


D-Day

아침. 눈을 뜨다. 흠흠. 목에 이상은 없다. 이마도 짚어본다. 기침감기도 거의 잦아들었다. 몸이 아프다는 변명은 틀렸다. 비가 온다. 많이 온다. 비가 많이 오는데 날 좋은 날 보자고 할까? 그것도 구차하다. 아이들 과외랑 학원을 챙겨야 한다고 할까? 아. 그러기엔 늦은 오후잖아. 언니의 전화가 왔다. 제주도에 갔다가 어제 돌아왔으면 피곤하지 않냐는 말에 전혀 그렇지 않다는 답이 돌아온다. 그럼 만나겠다는 말이겠지 생각한다. 언니는 비가 많이 오는데 괜찮겠냐고 묻는다. 언니도 약속을 취소하고 싶은 것인가 또 고민한다. 행간의 의미를 유추하느라 머릿속이 분주하다. 아니 오로지 약속을 취소하고픈 나의 마음을 지지할 끈덕지라도 있을까 싶어 모든 말을 주워 담는다. 하지만 틀렸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지금에 와서 사람 가볍게 뜬금없이 취소란 말인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또 겪긴 싫다. 그냥 만나자. 무조건.


3시간 전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아이들 밥을 챙기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미리 끝낸다. 마음만 바쁘다. 비가 제법 온다. 이 비를 뚫고 갈 수 있을까란 걱정을 다시 해본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비가 다시 잦아든다.


2시간 30분 전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린다. 유독 머리가 잘 마르지 않는 편이라 다 마른 상태에 자연스러운 웨이브까지 주고, 적당한 시간이 흐른 뒤 찾아오는 윤기까지 살리려면 적어도 2시간은 필요하다. 드라이를 하고, 중간중간 롤을 말아 웨이브를 유지한다. 밀크 커피를 한 잔 옆에 두고 정성 들여 화장을 한다. 파운데이션의 밀착이 잘 되도록 베이스를 바르고, 파운데이션을 적당한 두께로 얹는다. 매번 신경을 더 쓴 날은 파운데이션이 두껍게 발린다. 자연스러우나 잡티는 가리는 것이 관건이다. 펄이 살짝 가미된 아이쉐도우를 하고, 옅은 살구빛으로 덧바르고, 조금 더 짙은 브라운으로 음영을 준다. 긴 시간에 버틸 수 있도록 아이라이너를 여러 번 덧발라 그린다. 헤어와 같은 톤의 아이브로우를 쓱쓱 바른다. 누드톤으로 입술을 1차 커버하고 생기가 도는 틴트를 바른다. 커피를 마신다. 아직 1시간 30분이 남았다.


1시간 30분 전

의상을 고른다. 꾸안꾸로 보이려면 어떤 옷이 적당할지 고민을 한다. 네이비 체크무늬 미디스커트를 입고 회색 후드 티셔츠와 회색 반목폴라를 놓고 고민을 한다. 잔꽃무늬 퀼팅재킷과 카키색 숏패딩을 놓고 또 고민을 한다. 결국 반목폴라와 숏패딩으로 착장을 하고 밤색 앵클부츠를 신고 전신거울을 본다. 비 오는 날 스웨이드 부츠가 좀 그런가 생각한다. 다시 옷을 벗어놓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채 만날 장소를 검색하여 소요시간을 파악한다. 15분쯤 걸리는 곳이면 40분 전에 출발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전날 저녁 다음날 착장의상을 이것저것 미리 입어보곤 하던 나를 역시나 다른 별나라 종족 보듯 하던 신랑 표정이 문득 생각난다. 신랑이 없는 데 있는 것 같다. 친근하면서 무서운 느낌이다. 어릴 때 하루에 옷을 두 번씩이나 갈아 입어 칠면조라 불리던 나는 간혹 내재된 부지런함을 몰아서 발산하는 경우가 있다. 신랑은 항상 그 타이밍에 대해 의아한 시선을 보낸다. 여담이지만 나는 우리 집 공주가 어릴 때 이쁜 옷으로 코디하고 양갈래 머리를 땋고 리본핀으로 꾸미는 것이 하나의 재미였는데 그 노력이 무색하게 공주는 자라서 매일 학교 트레이닝복에 대역죄인 머리를 한 여중생이 되었다. 아이는 미적 감각보다는 무조건 편한 것이 좋은 것이라는 깨달음만 얻었다.)   


우리 집 여중생의 헤어스타일


1시간 전

커피를 한 잔 더한다. 밖엔 빗소리가 더해졌다. 곱게 화장을 하고 앉아 브런치를 살핀다. 너무 빨리 챙겼나? 아니지. 무슨 일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 미리 챙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아까 코디했던 옷으로 다시 주섬주섬 갈아입는다.


45분 전

비닐우산과 칼라무늬 우산 중 어떤 것이 오늘 의상과 어울릴지 잠시 고민하다 칼라무늬를 들고 나선다. 비 오는 날에 어울리는 음악을 고른다. 백 년 만의 외출에 조금 신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동을 켜놓고 플레이리스트를 검색하다가 요즘 유행하는 'Made You Look'을 틀어놓고 비 때문에 다운될 수 있는 기분을 조금 업시킨다.  


30분 전

장소에 도착. 다행히 장소 입구에 주차할 자리가 있다. 언니가 만날 장소의 위치를 알려주는 카톡을 보냈다. 나는 확인만 하고 차 안에서 기다린다. 내가 너무 일찍 도착한 걸 알면 챙기는 마음이 바빠질 수 있으니 답은 바로 하지 않는다.  


10분 전

나는 도착했으니 가게로 바로 오라는 카톡을 남기고 가게로 들어간다. 미리 자리에 앉는다. 그전에 어느 자리에 앉아야 상대가 편할지 고민을 한다.


5분 전

언니가 도착했다. 아. 지친다. 집에 가고 싶어 진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힘들다.




렇게 우물쭈물하던 마음과 달리 또 막상 약속장소에 나가면 그 자리에 더없이 충실하다는 것이 반전이다. 나를 세상밖으로 나오게 한 그녀는 사실 신랑의 여자 사람 친구이다. 신랑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오히려 내가 개인적으로 만나는 지인이 되었다. 그녀는 나를 항상 차분한 사람이라 말해주며, 나의 늘어짐까지 성향에 맞는 움직임이라 칭찬해 준다. 지적 호기심이 강한 그녀는 못 만난 몇 개월간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어떻게 충족시켰는지 부지런한 삶을 들려준다. 조금 반성이 된다. 나도 저렇게 에너지를 아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쳤던 마음이 무색하게 3시간 여 밥을 먹으며,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주로 언니가 그간의 생활과 그간에 품었던 생각들을 말하는 편이고, 나는 듣는 편이다. 머무를 시간을 예측한 후 커피를 배분하여 마신다. 오늘 커피만 세 잔 째라는 생각을 한다. 어느새 비가 그치고 해가 났다. 오래간만에 햇살을 마주하고 잠깐 현기증이 난다. 언니는 이야기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잔잔한 인연이 오래 이어지기를 바라본다. 길치인 나는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경로로 돌아서 왔다. 잘못된 경로에 진입하였다며 나무라는 그녀의 목소리가 앙칼지다. 하루의 여정을 끝내고 돌아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오늘만큼은 나도 여운이 남는 하루였다 생각해 본다.




집에 왔는데 오늘 새로 시작한 컴퓨터 온라인 수업 때문에 지쳐서 과외를 할 수 없다는 아들이 있고, GS편의점에 택배를 가지러 가야 하는데, 어제부터 가야 했는데, 귀찮아서 가기 싫다는 딸이 있다. 아이들의 저녁을 주문하고 포장하여 직접 가져올 생각이 충만했으나 그새 귀찮아져 배송비 4천 원을 지불해 버리는 어미가 있다. 이 나무늘보들 사이에 아이들이 해돋이를 가겠다는 말에 그저 좋아서 좋은 장소를 물색하고, 미리 전날 그곳을 찾아가 보는 수고를 무릅쓰는 유일하게 부지런한 아비가 있다.


우리는 에너지를 비축하여 꼭 필요한 곳에 간헐적으로 사용한다고 변명해 보지만 어느 날부턴가 신랑은 우리 셋 모두를 다른 별나라 이상한 종족 보는 듯한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나는 객식구인 주제에 자식까지 달고 온 비루한 여자가 되곤 한다. 아. 이런 지질하고 나른하고 게으르고 무력한 것들도 유전이 되는 것이던가.  



# 사진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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