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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여자 Jan 20. 2023

설날의 풍경


목욕


어릴 땐 설을 앞두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설의 전날이나 전전날. 목욕탕에 가는 일이다. 시골집의 구조상 세면장이 외부에 있어 추운 겨울엔 집에서 씻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한국 최대의 명절인 설을 맞아 소박한 시골사람이 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는 목욕탕에 가서 묵은 때라도 미는 것이었다.  


동네에는 목욕탕이 하나밖에 없었다. 거주 인구가 많지 않다 하더라도 설을 목전에 두고 밀려드는 사람들을 모두 수용하기에는 협소했다. 음식 장만을 서둘러 끝내놓고 아이들의 손을 이끌고 목욕탕에 오는 시간은 모든 집이 거의 비슷해서 실내는 이미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옷장도 가득 차서 늦게 도착한 우리는 여분의 대형바구니에 벗은 옷을 넣어 옷장 맨 위칸에 올려놓곤 했다. 나의 허물이 옷장 상부 어딘가에 가차 없이 노출되어 있다는 생각에 벗어놓은 옷가지의 형태만큼이나 쪼그라드는 마음이 되기도 했다.


탈의실을 지나 탕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하얀 김과 소리로만 이루어진 세상이 펼쳐졌다. 가운데서 펄펄 끓고 있는 물로 인해 주변은 온통 뿌옇게 흐려졌고, 웅웅 거리는 소리 사이로 아프다며 악을 쓰며 우는 아이의 소리, 아이의 등짝을 찰싹 내리치는 소리, 아주머니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한 번씩 따로 볼륨이 높여진 듯 들려오곤 했다. 사람들의 많은 소리가 모이면 뭉쳐서 어느 하나도 소리가 되지 않았다. 소리마저도 김을 먹은 듯 먹먹해졌다. 이 갑갑한 공간에서 무언가 하나만 빠져나갈 수 있다면 그것은 소리라고 생각했던 건지 굴뚝은 그 소리를 빼내느라 연신 힘을 썼다. 끊임없이 치솟는 하얀 연기는 뭉쳐진 소리 같았다.


엄마는 개선장군처럼 비좁은 곳을 비집고 들어가 우리가 앉을자리를 마련하곤 했다. 곳이 없는 공간에 우리의 틈을 만드는 것은 미안한 마음을 앞세워야 하는 일이었는데 틈에서 조금이라도 미안하기 위해 몸을 움츠리곤 했다. 탕에 서린 김은 아래에서부터 점차 올라오며 나목을 조여 오는 느낌이었다. 어린 아이들의 인내심이 바닥나기 엄마는 딸을 씻겨야 했는데 방금 생선을 찌고, 튀김을 하고 왔음에도 남은 전을 뒤집듯 우리의 몸판을 뒤집어 가며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 나중에 내가 엄마가 되어 딸을 데리고 목욕을 가서 씻겨보니 목욕탕에서 늘어진 기운으로 이외 다른 생명체의 몸까지 씻긴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밀다가 엄마가 너무 힘들다며 나가떨어지곤 했는데 그때마다 등이 벌게지도록 씻기고도 남은 힘으로 대야까지 말끔히 씻어내던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의 매운 손맛에 괜스레 화가 나곤 하던 우리는 목욕탕을 나서며 사주던 요구르트 하나에 금세 환해지곤 했다. 두 볼이 발갛게 익어 촌녀가 된 아이들은 이태리타월의 여운을 온몸으로 느끼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나와서 느끼던 바람은 장기 감옥수가 마침내 탈옥하여 맛보던 그것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두부 대신 요구르트를 한 모금 쭉 넘기며 다시는 안 와야지 다짐을 했다.


내가 고학년이 되고 우리 동네엔 목욕탕이 하나 더 생겨났다. 탕의 수가 늘어났고, 탕은 저마다의 세련된 이름도 가지게 되었다. 그곳엔 개별 샤워대도, 사우나도 있었다. 좁고 낡은 시설의 구 목욕탕과는 비교도 안 되는 신설 목욕탕이었다. 새 목욕탕이 생겨나고는 인원이 분산되는 것이 아니라 새 목욕탕으로 사람이 몰렸다. 그리고 사람들이 설날 전날을 피하여 미리 목욕을 다녀오기도 하고, 주거형태가 바뀌면서 더 이상 명절을 앞두고 전쟁을 치르던 풍경은 사라졌다.


대목에 해의 최대 매출을 기록하던 목욕탕은 그렇게 서서히 잊히다가 결국은 문을 닫게 되었다. 그래도 거대하게 솟아 힘 있게 연기를 뿜어내던 굴뚝은 여전히 추억 한 자락을 건네주려는 호기롭게 서있다. 나의 땟국물 가득하던 모습도, 촌스럽던 볼따구도. 나의 흑역사를 모두 기억하고 있다는 이유로 내 앞에서 너무 당당한 것이 가끔 미울 때가 있다.  



전 부치기


엄마는 우리에게 집안일을 거의 시키지 않으셨지만 설을 앞두고 전을 부치는 일만은 시키셨다. 반죽해 놓은 파전을 굽고, 고구마와 오징어를 튀겨내는 일 정도였다. 여동생과 나는 평상 위에 자리 잡고 앉아 이미 세팅이 된 조리도구 앞에서 전을 굽고 튀김을 했다.


오늘 아침에 아들을 억지로 끌고 가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벗어 던져놓은 옷을 개어서 정리하라고 했더니 어차피 몇 시간 뒤면 잘 거고, 또 금방 다시 입을 옷인데 이 비효율적인 일을 굳이 왜 해야 하느냐 반문했다. 뒷목을 잡으며 어차피 배출할 건데 밥은 왜 먹냐는 아주 원초적인 예시를 들었지만 한편엔 또 그런가 하는 생각이 잠시 피어났다.


내가 그랬다. 어차피 입으로 들어가면 그 맛이 그 맛인데. 전을 왜 굳이 얇게 구워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었었다. 동생이 구운 것과 내가 구운 것은 같이 두어도 전 위에 이름이 새겨진 듯 구분이 되었는데 희한하게 내가 부친 것은 아무리 눌러 부쳐도 두꺼워졌다. 사촌들은 얇은 것만 쏙쏙 골라내 먹으며 전 하나로 나의 음식솜씨를 비하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외쳤던 것이 그것이다. 결국 먹으면 똑같은데 왜 굳이.


내가 신랑과 데이트를 하던 시절. 엄마가 신랑감으로 희망했던 것은 딱 하나였다. 장남이 아닐 것. 신랑 친구의 결혼식에 갔다가 폐백을 드리는 곳에서 친구들이 00이네 집은 폐백 하는 데 엄청 오래 걸리겠네 했을 때에도 그저 갸우뚱했지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몰랐다. 그렇다. 신랑은 종갓집 장손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때는 이미 그러한 것을 이유로 헤어짐을 고려하기에는 너무 치사한 일이 될 시기였고, 엄마도 다행히 이 결혼은 반댈세를 외치며 하얀 띠를 두르고 드러눕는 드라마를 연출하진 않으셨다. 대신 이 작은 손이 그 큰일을 어찌 감당할지 걱정하셨다. 그때만 해도 내가 너무 좋았던 신랑은 시댁에 나를 덩치는 작아도 통뼈를 숨기고 있는 몸이라 가장하며 결혼을 강행했다. (나의 소극적이고, 소박한 성장에 대해서는 이미 말한 바가 있으니 통뼈는 가당치도 않다는 것을 이미 알 것이다.)


그 뼈대 있는 집안의 소속이 되어 전을 굽는 내 옆에서 또 그 얇은 전의 미학에 대해 주장하는 이가 있었으니 그것은 아군인지 적군인지 분간 못하는 신랑이었다. 음식이나 살림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나에 비해 신랑은 사과 하나를 깎더라도 어딘가 알 수 없이 정갈했다. 사과를 돌려 깎은 각도와 배열한 놓임새가 뭔가 달랐다. 그런 나를 진작에 파악하신 어머님은 전을 부치는 일을 나에게 일임하지 않으셨다. 신랑이 주 요리사가 되고 나는 그 옆에서 그저 반죽을 올리거나, 다음 전거리의 밀가루를 묻히는 보조자의 신세가 되었다. 그 삼엄한 기운이 감도는 곳에서 어느 날 잠시 비운 신랑을 대신하여 내가 뒤집개를 잡은 날. 돌아온 신랑은 한없이 두꺼운 전을 보고 눈치 없이 웃음을 터뜨리며 시선을 주목시킨 것이다. 나의 눈치코치는 아랑곳 하지 않고 이것 보라며 어머님의 눈앞에 나의 작품을 들이밀었다. 이 몹쓸 인간.


동생과의 전에서 항상 밀리던 내가 이제 시집와서 신랑한테까지 밀리다니. 뭣이 중헌디. 전 그게 먹으면 그만이지. 결국 소화되면 그만이지 않냐며 속으로 웅변을 하는 내가 있었다.


나의 전은 그 이후에도 절대 절대 얇아지지 않았다. 나는 나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여전히 대충 빨리 전을 굽는다. 그리고 얼른 신랑의 것 아래로 밀어 넣는다. 섞여서 표 나지 않게.



# 사진 출처 : https://blog.naver.com/sjmbr/6019862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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