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학원 앞을 서성이며 저곳에 합류하고 싶은 소망을 돌탑처럼 쌓아 올린 후에야 나는 간신히 학원을 다닐 수 있었다. 그때 엄마는 학원 학습에 대해 회의적이라는 아빠 핑계를 댔었지만 그것은 뻔한 형편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일 년 여의 시간이 나의 애절한 조름 또는 귀여운 협박에 넘어오는 데 걸린 시간이었는지, 그나마 학원을 하나쯤 보낼 여력이 생기는 데 걸린 시간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학원 학습보다는 스스로 깨우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는 아빠 핑계를 그럴싸한 허울로 여기며 남들보다 훨씬 늦게 피아노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피아노를 알게 된 이후 내 속에선 알 수 없는 분주함이 일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쉴 새 없이 꼼지락거렸던 것이다. 자의의 유무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느 순간 보면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었다. 수업시간, 길을 걷는 시간, 쉬는 시간 할 것 없이 내 손가락은 무언가를 연주하고 있었다. 피아노를 배우기 전 내 손가락은 그 요란함을 어찌 견디었나 싶게 시도 때도 없이 허벅지를 디딤 삼아 현란한 연주를 하곤 했다.
그 장르가 변경된 것은 컴퓨터 타자 연습을 하고 나서다. 연주의 늪에서 빠져나간 고요를 느낄 새도 없이 내 손가락은 타자 연습의 늪에 빠졌다. 소리 되는 모든 것은 손을 통해 글이 되었다. 어느 순간 사람들이 말을 할 때 속기사라도 된 듯 그대로 타자를 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허공에 부유하는 타자기를 끌어당겨 쉼 없이 글자를 만들었다. 내가 지나간 자리 뒤론 사람들의 대화가 기록된 인쇄물이 이만큼씩 쌓여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들의 말을 재빠르게 훔쳐내 살아 숨 쉬는 대본을 편철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나는 이 분주한 손놀림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러한 현상은 지루하거나 견디기 어려운 시간에 그 속도를 더했다. 지루한 상사의 훈시 말씀이나 어쩔 수 없는 의무 교육을 청취할 때. 눈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손이 있었다. 당사자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책상 아래에서, 또는 허벅지를 매만지며 은밀하게 이루어지곤 했다. 피아노 선율과 각진 한글 받침 중 내 허벅지는 어느 편이 더 부드러웠는지 모를 일이다. 그것은 허벅지의 선호를 물어볼 새도 없이 절로 이루어진 것이라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라고 설득하는 편이 나았다.
그랬던 나의 분주함이 아주 오랜만에 최근 그 노선을 달리했다. 브런치를 시작하고 나서다.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손가락에게 쉼을 주고 그 분주함이 숙주로 삼은 곳은 나의 머릿속이다. 어느 날부턴가 내 머릿속이 한없이 분주하다. 나는 이제 다른 이들의 모든 행동과 시선, 심리를 읽고 이를 문자화하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내 앞에 존재하는 이들이 대본에 따라 연극을 하면, 나는 이를 문자화하는 작업이다. 이전엔 선율 그대로, 소리 그대로를 문자화하였다면 이제는 내 시선에 한 번 걸러져 소화된 문자라는 것이 다른 점이다. 한층 더 고차원화된 작업을 하느라 내 머릿속은 쉴 틈이 없고, 내적 작업을 방해하지 않도록 발화는 가급적 삼가는 편이다.
<현장의 대화>
새우튀김을 하는 시어머니, 아들, 며느리.
시어머니 : 나와 봐라. 위에 거품을 걷어내야 될 거 아이가. 이리 줘봐라.
아들 : 아이고. 내가 알아서 합니더~ 줘 보이소~
시어머니 : 아따 마. 줘 보란께~ 내가 해볼게.
아들 : 아참~ 내가 할게예. 좀 기다려 보이소
며느리 : (시종일관 침묵)
<문자화된 작업물>
새우튀김을 하는 시어머니와 아들, 며느리가 있다. 며느리는 서열 2위 요리 보조자의 신세에서 서열 3위로 밀려났다. 주체적인 요리를 하는 시어머니와 아들이 있고, 감히 그들 사이에 끼어들 틈이 없어 수동적인 보조를 하는 며느리가 있다. 서투른 이를 보고 그냥 내가 하고 말지란 마음을 품는 아들은 시어머니를 꼭 닮았다. 서로를 서투른 이라 단정하고 앞다투어 손을 걷어붙이는 그들 사이에서 며느리가 할 일이란 그저 심하게 능동적인 저들을 이상하게 보지 않고, 섣불리 끼어들어 그럼 네가 하란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묵묵히 새우에 밀가루를 입히는 일뿐이다. 시선을 내리 깔고 그들의 말을 주워 담으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는 이렇게 시종일관 침묵하라는 대본집에 충실하며 그들의 말을 주워 담아 글을 짓고 있는 나를 본다. 위의 작업물은 명절날 내가 실제로 저 혼란스러운 현장에서 속으로 읊조린 문장이다. 새우를 튀기는 모자 앞에서 더 바쁘게 문장을 튀겨내는 나를 보며 피식 웃음이 났다. 이 정도면 신생 브런치병 중기쯤 되는 것인가 생각하면서.
우리는 서로의 균형을 해치지 않도록 그들은 일상을 고스란히 노출하고, 나는 그들이 누군가 훔쳐본다는 시선을 느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작업을 진행한다. 내가 그들의 일상과 감정을 엮어내어 그들의 얽매인 것들이 정돈될 수 있다면 그들도 그렇게 억울하진 않으리라 홀로 합리화하며 오늘도 그들의 말을 훔쳐 한 편의 글을 쓴다. 내 안의 분주함이 숙주를 옮겨가기 전 그들이 명품 문장을 쏟아내준다면, 더 늦기 전에 말기가 찾아와 모든 보이는 것들이 문장이 될 수 있다면 나의 충족감은 더할 나위 없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 사진 출처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