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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여자 Feb 07. 2023

전 눈물이 안 나요


전... 눈물이 안 나요. 그래서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안 해요.


영화 '접속'에서 수현은 동현에게 이렇게 말한다. 안구건조증이라는 병명으로 인공눈물을 수시로 넣어주어야 한다고 했다. 안구건조증. 그 당시 나에겐 신선한 병명이었다. 어딘가 세련되고 있어 보이는 병. 나도 누군가에게 안구건조증이 있어 눈물이 안 나요 라고 말한다면 어두운 사연 몇 페이지는 간직한 가련한 여성으로 보이지 않을까 웃으며 생각했다. 그 영화에서 안구건조증은 상징적 의미를 가진 장치라 했다. 수현의 물기가 사라진 눈은 보이지 않는 사랑의 상처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나.


그렇게 있어 보이던 안구건조증이라는 도시적인 병명이 그저 나이가 들어 노안과 같이 올 수 있는 흔한 병이란 사실을 그땐 알지 못했다. 얼마 전 나에게도 의사가 안구건조증이네요 라는 말을 무미건조하게 건넸지만 현실 속 내게 그 장면은 그리 영화 같지 않았다. 그저 빡빡한 성정이 조금 더 가미된 듯 건조하고 마르기만 했다. 아침에 눈을 떠 빡빡한 눈에 인공눈물을 선물하면서 나의 안구건조증은 내 삶에 있어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가진 장치인가 생각해 본다.


내가 엮어가는 인생이라는 하나의 영화 속에서 내가 감독이 되어 설정적 장치를 할 수 있다면 나는 눈에 보이게, 금방 알아챌 수 있게 쉽게 만들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 후회하지 않게,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아챌 수 있게. 굳이 굽이길을 돌아 결론에 이르지 않도록 쭉 벋은 대로 옆에 그대로 펼쳐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늘 버스 중간 좌석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어폰을 타고 음악이 흐른다. 그 아이가 듣곤 한다는 말 한마디에 플레이리스트를 바꾸고 말았다. 햇살이 내리쬐는 좌석에 앉아 이어폰을 뚫고 넘쳐나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잔뜩 이 난 내가 있다. 정수리에 원을 그리며 고여있던 햇살이 고요를 깨고 흩어진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한 번씩 흩날린다. 1.5배 이뻐진다는 말에 너도 나도 긴 생머리를 고수하고 귀고리를 잊지 않고 해 주던 시절이다. 나의 생김새와 얼굴형과는 무관하게 청순형이 곧 미인형이던 그 시절. 1.5배만큼 상향평준화 된 환경 속에서 개성 없이 청순에 목매던 시절 말이다.


버스 속에서 나는 그를 만나러 가는 설렘에 모든 것이 음악이었다. 흔들리는 차 속에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온통 내맡기고 그저 흔들렸다. 창 밖으로 초록 나무가 쉴 새 없이 지나가고 소박한 담벼락 위 무더기로 자라난 능소화가 끝 간 데 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차가 잠시 멈췄다 출발하는 순간 능소화 한 송이가 폭 꺾이는 것을 눈치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날 그렇게 한 사람만 바라보다 애절하게 끓는 마음이 꽃이 된 능소화가 한 계절 기다림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지는 순간에도 나는 온통 세상이 햇살이었다.


그와의 많은 추억이 있지만 그리운 장면 중 하나가 그를 만나러 가던 길의 설레던 내 모습이라 한다면 그는 다분히 서운할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던 순간의 내 모습이 지독히도 사랑스러웠던 나는 지금도 그렇게 많은 장면 중 유독 나를 기억하며 추억에 빠진다.


그때의 내 사랑은 영화 '봄날은 간다'의 유지태 같은 모습이었다. 라면 먹고 갈래요 라고 말하는 농익은 여자 앞에서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며 어리고 지고지순한 사랑을 말하던. 온 세상이 순수로 가득 찼던 나를 비웃듯 사랑은 봄날이 가듯 그렇게 나를 지나갔다.


나는 그와의 사랑을 성숙하게 마무리하지 못했었다. 요즘은 이별여행을 같이 하며 함께한 시간과 끝내 운명한 둘만의 사랑을 애도하는 시간을 가진다고 하던데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별의 순간에 우리는 어정쩡하게 물러나고 말았다.


하나의 영화가 채 마무리되지 못하고 끝난 것 같이 그 일은 늘 마음에 남았다. 그리움이라기보다는 아쉬움에 가까운 미련이었다. 새드엔딩도, 열린 결말도 아닌 채 늘 내 기억을 맴돌며 결론을 구하고 있었다. 그런 마음조차 잊힐 만큼 오랜 세월이 흘러 우연히 통화를 하게 된 날. 하고 싶은 말을 빙빙 돌며 시답잖은 주변인들의 안부만 물었다. 끝내 하고 싶던 말은 꺼내지도 못한 채 통화를 끝낸 후 나는 여전히 엔딩이 나지 않은 스크린 앞에서 주저하고 있었다. 용기를 내 톡을 보냈다. 그때 당신 덕분에 빛나던 시절이 있었다며, 늘 고마웠다는 말을 기어이 전하며 기나긴 미련을 종결지었다. 미움과 원망이 잔여물같이 남아있던 우리의 사랑은 이제야 타버린 초같이 촛농을 떨어뜨리며 열렬히 사그라졌다. 성숙의 시절을 보낸 우리는 한참이 지나 진짜 이별을 고하며 기나긴 영화의 엔딩을 장식했다.


능소화의 꽃말은 그리움이라 한다. 내가 지나던 버스 옆으로 꽃송이째 추락하던 능소화가 이 이야기의 복선이었다면, 설정적 장치였다면, 내게 클로즈업하여 보여주며 설정적 장치임을 눈치채게 했더라면 나는 과연 그 설렘을 거둘 수 있었을까? 아님 이별하며 좀 덜 아플 수 있었을까?


다시 돌아가서 내가 인생이라는 영화의 감독이 된다면 나는 이제 주인공들이 그 시절을 그저 지나도록 지켜볼 것이다. 처음 느껴보는 벅찬 설렘도, 마음 절절하게 끊어지는 이별도, 애타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도 그저 그들에게 맡기고 그대로 지켜볼 것이다. 사랑은 지나야 알게 되는 것이고, 그 시절이 생겨남은 반드시 그 이유가 있을 것이기에.


그래서 오늘 나의 안구건조증은 내 인생에서 아무런 장치도 아니다. 그냥 나는 이곳에 내던져져 하나의 영화를 엮어갈 뿐이다. 설정이 드러나고 상징적 장치가 들킨다면 인생은 재미없을 테니까. 클라이맥스의 감동을 제대로 느낄 수 없을 테니까. 대신 내가 엮어가는 나의 인생 영화는 호러나 액션이기보다는 멜로나 로맨스 장르가 되기만을 소박하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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