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은 대체로 오르막에서 시작되어 계속 하강하는 길이었다. 완만한 내리막길이 계속되었었는데 그 길을 따라 옆으로 작은 도랑이 흘렀다. 그리고 그 도랑과 마주한 곳에 또 다른 길이 있었는데 그 애매한 폭은 끊임없이 아이들의 뜀박질을 부추기곤 했다. 아슬아슬하게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은 그 거리는 아이들의 충동성을 매일 시험하였고 매번 시험에 빠진 아이들은 자칫하면 도랑 끝에 걸려 바닥으로 내쳐질 수 있음에도 그 위를 뛰어넘곤 했다. 한 마리의 홍학이 뒷다리를 차고 날아오르는 모습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비상하는 모습은 늘 멋있었다. 부유해 있는 동안 그들의 표정은 그 일을 해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오만함으로 가득했다.
가보지 않고 바라보기만 하면 늘 쉬워 보인다. 나 역시 충분히 날아오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에 무릎만 무한히 휘젓다 돌아오곤 했다. 나는 그때 진정 날아오르고 싶었다. 한 번의 뜀박질로 다른 지대를 딛는 경험을 하고 싶었다. 가로질러 간 그곳에서 무언가를 해낸 자의 오만을 맛보고 싶었다.
그러다 그런 오만함을 다시 한번 느끼고픈 충동이 생기던 시기가 있었다. 스물아홉을 지나 서른을 앞두던 시점. 그 경계는 너무 모호하지만 때론 명확해서 마치 서른이 되는 그날이 되면 나의 모든 것이 달라질 것처럼 세상은 말했다. 비릿한 청춘을 벗고 어엿한 성인이 되어 진정한 삶의 주체가 되어 살아야 할 것처럼 이른 충고를 하곤 했다. 서른을 넘어서는 순간 세상에 대한 환멸을 걷고 사랑엔 무뎌지고, 이별은 처연하게 받아들이는 나이를 마주하는 듯 우린 괜한 두려움과 불안을 느껴야 했다. 서른, 그게 뭐라고.
나는 그때 무릎에 힘주어 앞뒤로 반동을 하며 뛰어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른 그 두려운 나이를 가뿐하게 넘어서기 위해. 그 너머에 서서 미처 건너지 못한 이들에게 보여줄 나의 오만한 표정을 연습하며 서른을 맞이하였다. 하지만 그 너머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쓴 소주잔을 쥐고 서른 앞에 머뭇하던 나의 주저함과 하이힐을 매만지며 날 선 감정을 세우던 나의 불안을 비웃듯 서른은 그냥 무심히 와서 아무렇지 않게 자리했다. 기껏 서른이 된다는 것은 그저 어제보다 하루 더 나이 든 내가 되었을 뿐 사랑에 무뎌지거나 세상의 일에 합류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날아올라야 할 것 같이 나를 조여오던 세상은 정작 그 이후의 생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오늘 우연히 책장을 뒤적이다 서른 살을 주제로 한 테마 소설집을 보고 마흔이 훌쩍 넘어선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 책을 부여잡고 서른의 강을 무사히 넘기 위해 애쓰던 내가 생각나 조금 안쓰러웠다.
지나고 나니 서른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몇십 년이 지나 마흔 그것도 아무것도 아니더라고 메마른 입술을 적시며 말할지도 모른다.
그때 누군가 내게 오르는 순간보다 우아하게 착지하는 것에 대해 말해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그랬다면 뛰어오르는 일에 목매기 보단 자연스럽게 연착륙하는 일에 조금 더 마음을 썼을지도모르겠다.
그때 뛰어오른 나는 지금쯤 포물선의 어느 지점을 부유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제 안다. 천천히 내려가되 우아하게 내려앉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발레리나가 절정을 지나 피날레를 향해 나아가며 휘몰아치던 몸짓을 마무리할 때 어느 때보다 더 느린 속도로 우아하게 내려앉듯 나는 나의 우아한 착지를 매일 꿈꾼다. 서른을 아파하는 책쯤은 읽다가 잠들어버려도 아무 상관없는 나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