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지려는 목숨을 끝끝내 이어 붙여 생을 연장시킨 드라이기가 친정집 안방에 놓여있다. 생을 연장시킨 도구는 다름 아닌 노란색 불투명 테이프. 아빠는 테이프가 산소호흡기라도 되는 듯 물건 곳곳에 처치하여 사그라드는 생을 억지로 살려내곤 한다.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누더기를 입은 듯한 드라이기의 몰골을 보니 사물도 어떤 주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생이 달라진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만났다면 진작에 운명하였으리라.
지난번에 분명 새로 사드린 드라이기가 있는데 그것은 고이 간직해 두고 이렇게 이어 붙여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드라이기를 쓰는 아빠를 보니 불쑥 화가 났다. 새로 산 것을 꺼내지 않고 왜 이걸 아직 쓰냐고 잔소리를 해보지만 이내 소용없다는 것을 안다. 새것이 여기 있다며 서랍 어딘가에서 꺼내 주섬주섬 내 앞에 내놓지만 내가 가고 나면 밀쳐진 오래된 것이 다시 안방을 차지할 것이다. 아빠가 무언가를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일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일의 대부분은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아빠 때문이었다. 아빠의 그런 습성을 알면서도 엄마는 쓸모없다 생각되는 것들을 과감히 버리기 일쑤였고, 그런 엄마의 깔끔함을 알면서도 어김없이 아빠는 물건을 쌓아놓곤 했다. 상대를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무언가를 하는 것이 되는 아이러니라니. 하지만 그런 후엔 꼭 사달이 나는 것이다. 신문이나 기록물은 물론하고 사소한 영수증이나 작은 메모 하나까지 절대 버리는 일이 없는 아빠에게 그 많은 것들 중 어느 하나는 꼭 쓰임이 있는 날이 오고야 마는데 하필 그때 그중 하나라도 없어지면 아빠는 엄마를 탓하며 불같이 화를 내는 것이다.
그런 아빠는 중요한 물건이 없어진 일로 무슨 한 맺힌 일이 있으셨나 싶을 정도로 내 눈앞에 그 무언가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참지 못하셨다. 그 잠깐의 언제 있을지 모르는 필요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하는 아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논리라면 세상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물건이 침범한 공간은 아빠의 책상과 책장, 작은 방 한 편으로 한정되었는데 이러한 합의는 무수한 다툼을 벌인 결과 겨우내 얻어낸 것이었다. 그 선을 지키기 위해 아빠의 서류나 종이류는 공장 사무실이나 차량 안으로 일부 옮겨가기도 했다. 애초에 정리 DNA가 없는 사람이 버리지 못하는 미덕까지 갖췄으니 그 주변인의 고충이야 말해 뭐 하랴.
그러고 보니 어릴 적 장롱에 커다란 봉지 한가득 담겨있던 복권이 생각난다. 아빠는 생이 무료할 때마다 어쩌다 찾아올지도 모르는 요행을 바라고 주택복권을 사곤 했는데 그 종이마저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모두 모아뒀던 것이다. 그때는 그것들이 모아두면 나중에 무슨 가치가 있는 물건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했었다. 아빠가 행동하던 모든 것엔 의미가 있으리라 믿던 시절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저 버리지 못하던 습관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 종이들을 처리하기 위해 또 엄마는 어떤 산을 넘었는지 모를 일이다.
이러한 모습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고 치약의 중간을 짜서 쓰는 것처럼 같이 사는 가족에게 다소 불편한 습관 정도로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언젠가 '저장 강박증'이란 단어를 접한 후 우리 아빠를 표현할 수 있는 용어가 저와 유사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약 단계를 나눌 수 있다면 아주 경미한 저장 강박증 정도.
물건의 사용여부와 상관없이 버리지 못하는 일종의 강박이라 했다. 사물의 가치를 판단하여 쓸모가 없는 것은 버려야 하나 모든 사물이 언젠가는 쓰임이 있을 것 같다는 희망으로 모두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버려야 할 때 느껴지는 불편함이나 불안함을 회피하기 위해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모든 상황을 내 통제권 안에 두고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다. 아빠의 그런 삶은 과거 또는 미래에 저당 잡힌 삶 같았다. 과거의 쓸모를 잊지 못하고 미래의 쓸모를 기약하는 헛된 희망. 단호하게 현실을 마주하지 못하고 마치 인생의 전 기간에 걸쳐 고통을 나눠 쓰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 물건들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아빠에게는 모든 것이 의미를 가진, 언젠가 쓰임을 빛낼 소중한 물건이 되는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에겐 전혀 중요하지 않은 찢어진 종이 하나에도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한 결과 버리는 것에서 마치 나와 결부된 무언가가 없어지는 듯한 상실감마저 느끼는 것이다.
언젠가 죽은 아내의 시신과 21년간 동거를 한 외국인의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차마 보낼 수 없어 시신과 함께 동거를 한 것이다. 그 기사를 보며 왜 아빠의 책상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가치가 없어진 물건들을 쌓아놓고 괜한 의미를 부여하며 차마 버리지 못하는 집착. 그 후로 아빠 책상 위에 널브러진 찢긴 종이와 빛바랜 영수증과 메모와 오려진 신문 따위가 그들의 사체처럼 느껴졌다. 생명력을 잃은 사체가 쌓여 무덤을 이룬 그곳에 괜한 의미를 부여하고 집착하는 아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런 강박은 심리적 요인이나 트라우마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근무 환경, 어릴 적 정서적 유대를 받지 못한 심리적 빈곤 같은 것이 공허함을 형성하였고 그것을 채워진 물건을 통해 보상받았던 게 아닌가 싶다.
친정집엔 노오란 산호호흡기를 달고 연명하고 있는 많은 물건들과 책상 위에 쌓여 언젠가 부름이 있길 고대하며 먼지를 켜켜이 둘러쓴 수많은 물건들이 있다. 누군가 대신 채워주지 못하는 아빠의 공허함과 결핍을 치유할 힘을 가진 그것들은 다른 눈으로 보니 더 이상 사체의 더미가 아니었다. 내 눈에 죽은 것에 불과하던 그것은 힘겹게 숨을 내쉬며 아빠의 산소호흡기가 되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아빠는 이 물건들에서 불안을 쫓고 안정감을 느낀다 하니 아빠를 살리고 있던 것은 어쩜 이 물건들일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디지털 저장 강박증이 있다고 한다. 입꼬리의 각도가 미세하게 다른 사진이 수십 장 되고, SNS를 보다가 스크랩하여 저장한 사진이 넘쳐나 저장공간이 부족할 지경이지만 결코 보지 않을 사진들임에도 지우지 못하고 휴대폰 속에 저장하곤 한다. 그리고 최종본 문서를 만들기 위해 최종, 최최종, 최최최최최종이란 이름으로 저장하곤 하던 무수한 파일들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버리지 못하고 죄다 남겨두곤 했던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혹시나 언젠가는 쓰이지 않을까 하는 마음, 지우면 그때의 감정, 추억, 기억까지 모두 없어질 것 같은 불안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이러한 행동 역시 나의 불안한 마음 한편을 돌보는 하나의 안전장치였을지도 모른다.
버리지 못하는 행동들이 결국은 공허한 감정을 외부의 시도를 통해 메우려는 노력이었다고, 내 삶의 균형을 위해 끊임없이 산소를 공급하던 행위였다고 이해한다면 조금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과다한 애착과 그것을 비합리적 신념으로 뒷받침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 이상 적당한 저장 강박을 통해 안도감을 얻을 수 있다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는 꼭 버려야 할 것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애써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고 그 틈에서 공허함을 메우려 애쓰던 아빠를 조금 이해해보려 한다.
# 그림 출처 : IZZY_DIARY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