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골방여자 Feb 20. 2023

금색과 은색


이가 아프다는 느낌을 처음으로 느껴본 날. 내 여덟 인생에 그런 고통은 처음이었다. 아린 이를 부여잡고 밤새 끙끙 앓느라 한숨도 자지 못했다. 잠시 눈을 붙이나 싶으면 기다렸다는 듯 고통이 밀려왔다. 군것질을 하고 양치를 제대로 하지 않던 나의 모습을 반성하면 좀 나아질까 싶어 두 손 모아 빌던 밤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할머니 손에 이끌려 치과에 갔다. 내 생애 처음으로 간 치과의 기억이다.


처음 들어선 치과에선 소독약 냄새가 훅 끼쳤다. 너무도 생소한 모양의 의자가 있었고 의자에 고정되었으나 그 위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던 조명은 성큼 내게로 다가올 것만 같았다. 내 또래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어떤 처치를 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앉아 따라진 물로 가글을 했다. 저런 행동은 이곳만의 약속된 행동인가란 생각이 들었고 이내 저런 행동을 자연스럽게 수행하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선 할머니를 앞세우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차마 그 이유를 말할 수 없어 이제 안 아픈 것 같다며 애써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또 한쪽 뺨을 부여잡고 속으로 울었다. 그 아이의 자연스럽던 모습이 떠오르며 그게 뭐라고 촌스럽게 돌아온 내가 미워 또 울었다.


충치가 생기기 전엔 치과에 갈 일이 없었다. 나의 유치를 뽑는 의사는 나의 할머니 아니면 이웃집 할머니였다. 그들은 주특기가 달랐는데 우리 할머니의 주 무기가 실이었다면 이웃집 할머니는 맨손이었다. 이웃집 할머니표 발치는 아주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어디 얼마나 흔들리나 보자며 이를 앞뒤로 흔들어보는 듯하다가 방심한 사이 이마 치기 신공을 선보이며 이를 뽑아내곤 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얼떨떨해 있는데 주위에선 환호를 보내는 탓에 울 것 같이 웃곤 했다.


반면 우리 할머니는 흔들리는 이에 하얀색 실을 몇 번 두르고 흥부네 박 타듯 슬겅슬겅 당겨보다가 이마를 탁 치는 것과 동시에 실을 당기는 방식이었다. 물론 한 번 실패를 맛본 경우는 방금 울면서 타고 온 자이로드롭을 다시 타야 하는 것과 같은 공포를 겪어야 했다. 할머니의 타율은 백 프로 성공을 보장하지 못하였기에 우린 늘 아랫니를 덜덜 떨며 긴장해야 했었다.


실은 때로 스르르 풀어지기도 했고, 이는 두고 실만 쏙 야무지게 빠지기도 했다. 이를 뽑는 자와 이를 당하는 자 중 누구의 공포심이 더한 지 겨루기라도 하는 듯 그들의 동공은 사정없이 흔들리곤 했다.


여러 번 이를 묶어 타액이 가득한 실이 나의 생각을 묶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내 여덟 살의 '그레서'와 '금색과 은색'이 그랬다. 묶어도 자꾸 실이 빠져버리고 남는 이처럼 여간해선 뽑히지 않았다.


나의 일기장의 '그레서'엔 늘 빨간색 실선이 그어지고 옆에 '그래서'라고 교정이 되어 있었다. 유독 이 접속사를 많이 사용한 탓에 한 페이지에서 여러 곳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언제부터 그레서가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한 번 그렇게 생각된 이후로는 잘 바뀌지가 않았다. 아무리 실을 묶어 뽑아내려 해도 뿌리가 녹지 않은 유치였는지 뽑히지 않았다. 나는 그 혼동을 아주 오래 했던 것 같다. 그레서 인가 아니 그래서 인가 아니 그레서 였지. 그 접속사 앞에서 한없이 헤매곤 했다. 그게 언제 뽑히고 그래서로 자리하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실패를 거듭하던 어느 날 작정하고 이를 인질같이 묶던 할머니의 단단한 손끝이 생각난다. 그런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어느 날 뽑혔지 싶다.


그리고 또 하나 금색과 은색이다. 나는 금색과 은색을 반대로 알고 있었다. 이것도 어느 날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그 사실은 실로 충격이었다. 그 이후 나는 금색하면 흰색 계열을 먼저 떠올렸다가 다시 반대로 노란색 계열을 떠올리는 우회 작업을 해야 한다. 금색과 은색만 나오면 늘 주춤하며 생각의 속도를 올린다. 더 신기한 것은 이러한 착각을 내 여동생이 똑같이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가 추측한 바로는 우리가 접한 금색과 은색은 크레파스가 유일했으므로 그 크레파스 중 색깔명이 잘못 적힌 게 있었던 게 아닌가 한다.


금색과 은색의 유치는 아직 실이 걸린 상태다. 매번 실을 돌려 매 단단히 묶어보지만 번번이 빠지는 통에 아직 유치가 뽑히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나는 늘 생각을 우회하는 습관을 들여야 했고 그 일은 생각하는데 품을 더 들여야 하는 일이었다.


유치는 아무 때고 쉽게 빠지는 것이 아니었다. 흔들릴 만큼 흔들리고 뿌리가 적당히 녹은 후에야 절로 빠져나왔다. 빠지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게 아직 다르게 한 번 더 생각할 기회를 주기 위함이리라. 지금 굳어진 생각이 맞는지, 혹여나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는 한 번 더 돌아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그런 습관은 때로 생각을 유연하게 했고 생각의 깊이를 더해주었다.


내 생각이 흔들릴 만큼 흔들리고 절로 울림이 될 수 있는 날. 금색과 은색의 유치는 절로 빠질지도 모른다. 나는 그동안 자꾸 속절없이 흔들리며 그때를 기다릴 것이다.



# 사진 출처 : 픽사베이

작가의 이전글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