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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여자 Mar 02. 2023

주방의 시간


12시가 가까워지는 시간. 오늘은 주방 식탁에 앉아 자판을 두드린다. 노란빛 조명이 드리워진 나무식탁에 앉아 이곳의 시선을 느껴본다. 나를 마주 보는 곳에 위치한 베란다에만 작은 등이 켜져 있다. 한껏 올려진 거실창 블라인드 사이로 노란빛이 수줍게 나를 바라본다. 나도 저도 오늘밤 서로의 낯선 모습을 훔쳐보는 중이다. 이 시간 식탁에 사람의 온기가 느껴진 적은 없었으리라.


내 머리 위에서 노란색 조명이 부드러운 선을 그리며 떨어지다가 사물의 마찰면에서 희미하게 흩어진다. 사물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고 희부옇게 어우러지는 시간이다. 너무 분명한 것보다는 이렇게 서로의 경계를 조금씩 넘보아도 의심 없이 스며드는 이 시간이 좋다. 드러내지 않고 물러나는 아련한 번짐이 좋다.


아마도 이곳엔 어제와 오늘 내가 희생시킨 생선의 혼이 떠돌고 있을 것이다. 지난번 포항에 갔던 날 한 대게집에서 나온 생선의 맛을 잊지 못한 아들은 납작한 생선에 발린 짭조름하면서도 달달한 소스맛을 구현하기를 원했다. 이에 부응하여 친가, 외가 할 것 없이 생선을 공수하여 무한정 공급하니 나는 본연의 맛을 잃지 않으면서도 소스맛이 자연스럽게 배는 맛을 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손끝에서 대여섯 마리의 생선이 희생되었다. 장금이가 마냥 생선을 대령하여 이것이 그 맛이온지 여쭈면 이 집 세자는 미간에 내천자를 그리며 매번 맛이 아니라 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시중 데리야끼 소스, 외할머니표 간장소스, 믹스한 소스 다양한 소스로 시도를 하였으나 끝내 아드님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생선으로 태어나 제 한 몸 희생하여 인간들의 미각을 일깨우고자 함이 전부이던 그들은 그조차 좌절되자 분신을 시도했고 급기야는 새까만 몸이 되어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그 원망을 내게 쏟으며 지금 원혼이 되어 이곳을 떠돌고 있을 것이다.


신혼 초. 생선을 굽다가 신랑과 다투던 기억이 난다. 나는 정리를 하면서 다른 요리를 하자했고, 신랑은 요리를 끝낸 후 한 번에 정리를 하자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 그지없지만 실력이나 경험면에서 누구 하나 나을 것 없던 우리는 서로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주방에서는 오로지 주방에서만 확인 가능한 내공을 가진 자가 우위를 차지할진대 그런 면에서 우린 둘 다 서로를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각자의 요리를 한다. 서로의 동선을 피해 가며 적당히 분업하여 식탁을 차린다. 서로의 내공을 믿어서라기보다는 분쟁을 피하기 위한 방법을 택한 것이다. 쓸데없는 일에 소모적인 다툼을 하던 우리는 이제 조금 현명한 동반자가 되어 주방을 공유한다.


각자의 빛으로 서로를 쏘기 바쁘던 우리는 마찰을 피하기 위해 각자의 조도를 낮추는 방법을 택했다. 서로의 눈이 시리지 않고 불편하지 않도록. 주방에서의 내공을 시험하기보다 서로의 부족한 면을 서로가 채우며 희부옇게 스며드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지금은 어둠이 뒤덮여 사위가 고요해진 밤이다. 내가 설거지를 끝내고 손을 탈탈 털고 미련 없이 이 자리를 떠나며 밝은 조명을 내리고 낮은 조명을 딸깍 켜두는 시간. 예전에 할머니께서 단체 관광을 다녀오시면서 팔도의 관광지가 슬라이드처럼 넘겨지는 카메라를 사 오신 적이 있다. 카메라에 눈을 바짝 대고 버튼을 딸각 누를 때마다 유명 관광지 사진이 연이어 펼쳐졌다. 지금 나는 그 전환 버튼을 누른 것이다. 조명이 바뀌면 이곳은 전혀 다른 시점의 화면으로 전환된다. 낮은 조도 아래 하루를 마무리하고 다음을 준비하는 주방의 시간은 숙연하고도 고요하다. 어떤 것은 절로 사그라드는 시간이 있다. 딸각하며 슬라이드를 넘기는 순간 이곳에서의 서툴거나 미숙한 것들도 함께 다음 장면으로 사라진다.


나는 내일 또 생선을 굽고 소스를 시험해 볼 것이다. 아이는 이제 생선이라면 진저리를 칠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미각을 위해 먼저 간 자들의 넋을 기리고 원혼을 달래기 위해 내 반드시 미각을 일깨우는데 일조하리라. 생각해 보니 생선과 내가 서로의 내공을 의심하며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 기싸움을 하느라 이런 사태가 일어났음에 반성하는 바이다. 때가 되었다며 제가 몸을 뒤척일 때 나는 고집하며 뒤집지 않았고, 간이 과하다 청할 때 이를 곧이듣지 않았으며, 소스를 일찍이 졸이는 것은 저를 태우는 이라 저어하였으나 이를 간과한 잘못이다. 내일은 서로 조금씩 맞춰보자며 화해의 손길을 내밀까 하는데 그간 전적이 있어 동족을 해한 죄를 사하여줄지 의문이다.



# 사진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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