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의 업무는 언제나 ‘피해자’를 찾는 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피해자’라는 말은 늘 불안정하다. 피해자의 기준은 무엇인가?
내가 하는 일이 누군가의 억울함을 구제하는 일이라 믿었지만, 그 억울함의 경계는 생각보다 얇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해’와 ‘피해’는 명확히 갈리지 않았고, 그 경계는 때로 현실의 이해관계 속에서 흐려졌다.
대기업도 역으로 피해자가 되면 안 된다.
대기업이 선의의 피해자가 되지 않는 것. 이 역시도 굉장히 증요하다. 그래서 기록과 자료에 대한 꼼꼼한 검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거대하고 힘 있는 존재 그 자체가 악이 아니듯, 상대적으로 힘 없는 존재 그 자체가 선은 아니다. 구조적 문제에 기초하여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세워야지, 이를 선과 악의 개념에서 접근하면 안 된다.
대기업도 피해자가 되면 안 된다는 재단의 선언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문장에는 더 복잡한 함의가 숨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대기업은 기술 탈취 가해자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대기업이라는 강자 프레임에 갇힌 구조의 희생자일 수도 있었다.
어느 날 접수된 사건 하나, 겉으로 보기엔 전형적인 ‘대기업의 기술탈취 사건’이었다.
중소기업의 아이디어를 활용해 거대한 제품 라인을 만든 뒤,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작은 기업은 “우리를 삼킨 괴물”이라 표현했고, 언론도 그 프레임에 동조했다.
그러나 자료를 검토하면서 보인 건, 다른 결이었다.
보고서와 계약서, 그리고 수많은 이메일 속에는 ‘공동 개발’의 흔적이 있었다. 문제는 합의의 해석과 공동 개발의 경계였다. 공동 개발에 있어 원천 기술에 대한 정당힌 대가가 지급되었는가? 힘있는 측이 소위 갑질을 자행하며 약한 측의 노력과 성과에 무단 편승하였는가?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충돌했지만, 그들의 언어는 모두 정당해 보였다. 누구도 명백한 악의를 품고 있지 않았다.
다만, 각자의 필요와 생존이 이견을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때 느꼈다.
공익은 단순한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
약자를 돕는다고 해서 곧 옳은 것도 아니며, 강자를 견제한다고 해서 정의로운 것도 아니다.
때로는 그 ‘정의’라는 이름이 누군가의 노력을 짓밟기도 한다. 대기업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문장은, 공익의 균형을 지키라는 경고였다.
재단에서는 매 사건마다 기록을 남겼다.
어떤 근거로 판단했는지, 어떤 검토가 이루어졌는지를 모두 적었다. 그 기록은 단지 절차를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사건의 복잡함이 깊어질수록, 우리의 언어는 조심스러워졌다. 누군가를 돕는 일이 누군가를 해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내 몸은 점점 더 나약해졌다.
신장은 약물에 지쳐 있었고, 피부는 푸석해졌으며,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것이 고통이었다.
회의 도중 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책상에 손을 얹고 버티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순간에도, 서류를 덮을 수는 없었다.
공익이라는 말은, 여전히 나를 붙잡고 있었다.
어느 날 새벽, 일을 하다가 문서를 다시 들여다보며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공익’이란 무엇인가.
혹시 그 단어는, 우리가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구가 아닐까.
공익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판단하고, 배제하고, 도왔다.
그 모든 판단이 결국 또 다른 공허를 낳는 것은 아닐까.
대기업도, 중소기업도, 모두 인간의 선택으로 움직인다.
그 선택은 이해관계와 필요 속에서 만들어진다.
공익의 이름 아래 그 복잡한 인간의 욕망을 단순화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오류를 범한다.
정의는 늘 선택의 언어이고, 공익은 늘 상대적인 그림자다.
그래서 사건을 기록할 때마다, 마음속에서는 늘 두 개의 질문이 교차했다.
“이 기업은 도움을 받아야 하는가.”
"이 결정은 다른 누군가를 해치지 않는가.”
그 질문을 완벽하게 해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결국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불완전한 정의를 추구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공익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모두를 구제할 수는 없고, 모두를 만족시킬 수도 없다.
다만, 어느 한 순간에 최선을 다해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 그 자체가 의미가 된다.
그 노력은 완전하지 않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얼굴을 본다.
“허(虛)는 채움의 근원이고, 공(空)은 있음의 시작이다.”
비어 있기에 채울 수 있고, 완전하지 않기에 성장할 수 있다.
그 말처럼, 공익은 늘 비어 있었다.
그 비어 있음 덕분에 우리는 매 사건마다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었다.
그 공허함은 좌절이 아니라, 성찰의 틈이었다.
재단의 책상 위에는 여전히 수많은 사건 파일이 쌓여 있다.
서류 속 숫자와 문장, 이메일의 흔적, 기술 도면과 회의록.
그 모든 것은 인간의 욕망과 믿음, 오해와 기대가 뒤섞인 증거였다.
그 속에서 우리는 매번 균형을 찾아야 했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말이 얼마나 무거운지, 그 무게를 견디는 것이 공익이라는 사실을, 늦게야 알았다.
결국, 대기업도 피해자가 되면 안 된다는 말은 이렇게 변했다.
“누구도 정의의 이름으로 소모되어서는 안 된다.”
공익은 균형 위에서만 살아남는다.
한쪽의 고통을 돕는 일이 다른 쪽의 상처가 되지 않도록, 그 경계 위를 걷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 그리고 내가 아직 이 길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