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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된 사랑은 축복이다

원하는 것이 눈앞에 없다면

by 심야



인생이라는 바다 한가운데 육체는 배가 되고 마음과 의지가 선장이라면, 나는 오랫동안 조종실의 타륜이 아닌 작동될 리 만무한 가짜 모형에 의지해 항해하며 살던 시절이 있었다.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저 무수히 많은 폭풍들을 홀로 견디다 못한 배가 하염없이 침몰 중일 뿐이었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이 악문 손에 힘을 주어봐도 고정된 모형은 뻑뻑하게 닫힌 피클통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손바닥은 자주 화끈거리고 저릿했으며 손목은 욱신거렸다.


무심한 나는 이런 고통쯤은 참는 것이 미덕이라 여기며, 뜨듯한 밥 대신 꿀꺽 삼키곤 했다. 그 탓에 늘 배가 불러 끼니를 건너뛰기 일쑤였다.


외로운 배는 이 파도에 이리 치이고 저 파도에 저리 치이며 제멋대로 나아갔다.


파란 하늘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 눈 감을 때마다 보이는 검은 허공에 번쩍이는 푸른색이 푸른색이 맞거나 틀리다고 증명할 방법이 없으므로 어쩌면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거센 비바람에 나는 희망을 잃어갔다. 영원히 원하는 곳에 다다를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반복되니 신념이란 물질로 변질되었고, 두 손은 석화되어 단단한 돌로 굳어져 갔다.


어느 날, 영원히 치솟기만 할 줄 알았던 엄마와의 갈등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전까지 사이가 좋았던 적도 없었기에 평소와 별다른 일은 생기지 않을 예정이었다. 전생에 엄청난 빚을 지어 이번생에 원수로 만난다면, 그게 엄마와 나일 터였다. 이런 게 운명인 거겠지.


그렇게 체념한 일상 속에서 거리를 두고 엄마와 산책 중이었다. 침묵은 유지되었고 참다못한 엄마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러나 입과 귀, 마음마저 꾹 다물어버린 나는 앞만 보고 걷고 있었다. 최후의 수단으로 엄마는 속마음을 내뱉었고, 가짜 모형은 순식간에 모래가 되어 바닥의 갈라진 틈으로 흩어져버렸다.


"De toute façon je sais

que tu ne m'aimes pas."


"어차피 나는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어."


나는 내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구나. 눈을 감고 기억 상자를 엎어버렸다. 그러자 스쳐 지나간 인연까지 모두 적어뒀던 구겨진 카드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구나, 왜 그랬을까. 그제야 나도 모르게 옆으로 고개가 휙 하고 돌려져 주인 없던 타륜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기다렸을까. 굴레의 이유는 단순했다.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절벽에서 몸을 던지듯 바닥에 쿵하고 부딪혀

넘어졌다. 나를 일으켜 줄 어른이 없다면 내가 나의 어른이 되리라. 나의 뿌리에 부모의 뿌리가 자라났다.


새로운 시각으로 나를 바라보자 석화는 더욱 빠르게 진행되었다. 고장 난 마음의 깊이에 대한 이해가 수육처럼 두터워졌기 때문이다. 딱딱하고 차가운 벽이 되어버린 나는, 고아구나.


나의 마음을 대변하듯 배가 잔인한 괴성을 내질렀다. 바깥을 살펴볼 순 없어도 알 수 있다. 시험기간이 끝나고 방학이 찾아온 것이다. 성실하게 억압해 온 감정들이 찢어진 천 사이로 와르르 쏟아지며 폭풍은 한층 더 거세졌다.


끝없는 저항 끝에 반전 없는 좌절이 나의 온통을 반겼다. 나의 어디까지가 바다의 소금으로 버무려질 셈인가. 마침내 나는 나와의 전쟁에서 항복을 선언했다. 인정한다. 나 혼자의 힘으로는 바다를 건널 수 없다. 인간은 혼자 클 수 없다.


돌덩이 같은 몸을 이끌고 아일랜드 식탁에 앉았다. 아빠는 진미채 무침이 얼마나 맛있게 만들어졌는지 신나게 얘기해 주고 계셨다. 마침 기분도 좋아 보이시고 지금이 아니면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는 오지 못할 것 같았다. 병원에 가봐야 될 것 같다고 했다.


아빠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내 말을 흔쾌히 받아들이셨다. 그러곤 바람도 쐴 겸 공원에 놀러 가자고 덧붙이셨다.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런 반응을 예상한 게 아닌데. 온몸으로 버려질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나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소리 없는 울음을 터뜨렸다. 용기 내길 잘했구나. 별거 아니었구나. 이방인은 나의 가족이었고, 그의 따뜻함이 경직의 폭풍을 순식간에 잠재웠다. 나는 정서적 고아가 아니다.


뒤돌아보니 배의 방향을 비트는데 타륜은 필요하지 않았다. 저항을 내려놓기만 한다면 바다는 기꺼이 원하는 쪽으로 바람을 불어주며 선박이 어디든 나아가게 밀어준다. 애써 모든 걸 통제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나의 바다는 스스로를 사랑하는데 방해되는 것들을 직접 마주할 수 있게 일부러 넘어지라고 인생 곳곳에 적절한 장애물들을 설치해 둔 것이다.


가족이 생긴 뒤 많은 것들을 떠나보냈다. 그 과정에서 내가 갈구해 온 것들을 자연스럽게 발견했다.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구나. 나는 내게로 돌아왔다.


결핍된 사랑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질문을 던지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이 뭔지 알고 싶다고.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내 현실을 창조하는 첫걸음을 내딛는 것이었다.


하지만 묻는 순간 전부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결핍된 사랑 없이는 지금의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핍된 사랑은 사랑을 깊이 경험해 볼 수 있는 여정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깊이에는 끝이 없다. 끝이 없다는 건 시작도 없다는 것이니, 결핍은 사실 단순하다. 영원의 우주 속에서 과정이란 허상을 체험하기 위해 시작을 축복해 준 것이다.


한 번에 모든 것을 깨닫고 완성되는 것이 아닌, 순차적으로 일부이자 전체일 주제들이 내게 던져졌고 그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는 내 자유였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 눈앞에 원하는 것이 없다고 불안해할 필요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지금 내게 없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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