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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무너지고 있다면

기뻐해라.

by 심야


다 같이 점심을 먹다 말고 느닷없이 엄마가 울었다.

동생이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기숙사에 가서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주말에 집에 오더래도 떨어져 지낼 생각에 운 것이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챈 나는 울컥했다.

엄마는 옛날 생각이 난 것이었다. 만 10살의 나를 기숙사에 보내야 했던 그때가 말이다.


가족들과 떨어져 있으면서 내가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공부뿐이었다. 즐겁지 않아도 해야 했다. 살아남으려 공부했다.


그것이 내 세상의 전부였던 학교에서 어른들로부터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나와 7년을 함께한 학교 기숙사의 방은 언제나 사람이 없고 조용했다.


모든 방은 두 개의 침대를 지니고 있었지만 독방으로 썼다. 쓸쓸함과 씁쓸함을 증폭해 예술 작품으로 만들어진 가짜 같았다.


쨍한 초록색의 두꺼운 암막커튼, 샛노란 방바닥, 창문의 양 옆의 벽에 붙어 마주 보는 두 책상과 책장, 침대 두 개와 두 옷장.


미술관에 전시했어야 할 방이었지, 사람이 살만한 곳은 아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기운을 빨아먹고 사는 그 흡혈귀 같은 기숙사를 얼마 버티지 못하고 떠나곤 했다.


나는... 매년 무거운 캐리어를 질질 끌며 언덕을

올랐다.


"아 올해도 또 돌아왔구나..."


만들어진 당찬 걸음으로 악몽 속에 뛰어들었다. 루프물에 갇힌 주인공 같았다.


또한 오늘은 사이버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첫 수업을 들은 날이기도 했다. 1차시를 듣고 2차시를 듣는데 눈물이 났다.


교수님께서 앞으로 강의할 내용을 설명하시는데 듣기만 해도 너무 설렜고 기대되었다.


공부라는 게 그냥 재밌고 행복하기만 한 순간이 오기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렸던지...


생존을 위한 공부와 작별하기까지 10년 걸렸다.


나는 공부가 좋다. 새로운 걸 배워 내 우주를 확장하여 더 넓은 세계를 보게 되는 과정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좋은 공부가 중학생 때는 성적을 잘 받아야 했고, 고등학생 때는 반드시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협박 아닌 압박과 함께 해야만 했다.


중학교의 나는 사회의 발전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고자 했고 사명감에 법을 선택했다.


그게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냐'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프랑스 교육 과정이 개편되어 3개의 전공을 선택해야 했다.


문과인 나는 '경제와 사회과학', '인문. 문학. 철학', '역사-지리. 정치지리. 정치학'을 골랐다.


(이름이 너무 길어 줄임) 인. 문. 철은 평생 책을 좋아한 내게 있어 뻔한 얘기들 뿐이라 지루하기 짝이 없었고, 경사는 실용적인 학문보다는 이론에 가까웠기에 아무 생각 없었다.


그러나 역사를 원체 좋아한 나로서는 역지정정이란 전공을 사랑했다. 그래서 법과 정치학이 내 미래 진로가 될 듯하였다.


고등학교 2학년이 끝나고 내게 번아웃이 찾아왔다. 지금까지 자신을 너무 몰아붙이며 살아온 결과였다.


당시에는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였다. 치료할 마음조차 없었다. 그냥 방치해 뒀다.


3학년에도 역지정정 전공을 계속 공부하고 싶었으나 수업 시간이 맞지 않아 포기해야 했다. (2학년 전공 3개 선택 - 3학년은 3개 중에 2개만 남길 수 있음)


9월에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번아웃 증상이 심해졌다. 같은 문장을 계속 읽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2배 더 열심히 했다. 그런데도 원하는 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그중에서 '철학'이 골칫덩어리였다. 프랑스 교육 과정은 고등학교 3학년 1년 동안 프랑스어 대신 철학을 공부한다.


프랑스의 모든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과목이다. 점수를 짜게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3학년이라 프랑스 수능인 바칼로레아를 준비해야 된다. 아예 공부법마저 새로 배워야 하는 과목을 고등학교 3학년에 배운다니 비상식적이다.


가장 화나는 건 정답이 없는 학문이라는 점이었다. 때문에 선생님마다 점수가 달라진다.


또 시험 방식은 질문 한 문장이 다다.


그 한 문장을 분석해서 생각을 정리한 다음, 내 의견에 들어맞는 철학자들의 사상을 근거로 넣어야 한다. 4시간 안에 최소 4장을(최대는 제한 없음) 작성해 내야 한다.


즉 철학이란 과목의 성적은 노력에 비례하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너무 받은 나머지 매주 월요일 아침 첫 두 교시의 철학 수업 내내 공황 발작이 오곤 했다.


손끝이 차가워지고 오한이 들며 숨이 안 쉬어졌다.


당장 구급차를 불러야 될 것 같은데 그냥 깡으로 버텼다. 당연히 수업은 들리지도 않았다.


최선의 최선을 다해도 결과를 통제할 수 없었다.


12월이 왔다.


1월에 원서 접수가 시작하여 진로를 확정 지어야 하는 달이었다.


나는 정말로 법이 하고픈가?


프랑스에 가서 법을 공부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지금보다 더 불행해질 게 눈에 훤했다.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것들을 정리해 보았다.


근래의 나는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가지게 되었었다. 중학교 때부터 시나리오 작가를 꿈꿨던 것이 한층 확장된 것이었다.


말하자면 사실 이중생활을 해온 것이었다. 되어야 하는 나와 되고 싶은 내가 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되고 싶은 나의 정체성은 존재할 권리조차 철저히 억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마지막 순간에 진로를 엎어버렸다.


수시로 원서 접수하는 10개의 학교들 중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영화학 또는 연극이랑 관련된 전공을 선택했다.


3월이 되었다. 병원에 갔다. 뇌파를 검사했다.


검사 결과가 나왔다.


의사 선생님은 불안 수치가 이보다 더 높게 나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아.


두 달이 지났다. 나는 1 지망 학교에 합격했다.


무덤덤했다. 대학에 가고 싶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살아있을 거라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한 달 동안 이어진 프랑스 수능을 보았다.


결과는 뻔했다. 번아웃인 상태에서 바칼로레아를 망치지 않을 수 있는 선택지는 없었다. 뭐 어차피 자포자기인 상태였다.


졸업을 했다.


거짓말처럼 오래전 졸업 할 때까지만 버티자던 말을 몸이 내내 구석에서 곱씹고 있었던 모양이다. 정신 체계가 무너진 만큼 신체건강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프랑스에 갔다.


대학을 2주 다녔다. 몸이 너무 아파서 다닐 수가 없었다.


하루에 샤워를 하고 장을 보면 박수받아 마땅할 일이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하루종일 가만히 앉아 내면 치유를 할 시간이 없었다. 이제는 넘쳐나는 게 시간이었다.


매일매일 새로운 아픔들이 떠오르면 있는 그대로 마주했다. 그때로 돌아가 못했던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해 12월에 한국에 돌아오기까지 사실 나에게는 파리에서의 짧은 생활이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살면서 처음 해보는 것들을 매일 했기 때문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고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어보았다. 매일 빵집에 가서 빵을 사 먹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버리리라.


파리는 아무 빵집에 들어가도 한국의 맛집 그 이상의 맛이다. 그때의 빵들이 그리워진다.


또... 장 보는 것도 너무 재밌고 즐거웠고, 돌아오는 길에 아기자기한 집들을 구경하는 것도 좋았다. 그게 다다.


한국에 돌아와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나는 한국 초등학교를 다녔지만 졸업하지 못했기 때문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총 1년 반에 걸쳐 차례대로 준비했다.


완벽했다. 번아웃과 우울증을 완전히 치유하는 데 총 2년이 좀 넘게 걸렸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검정고시 교재를 처음으로 펼쳤던 때가 생각난다. 같은 페이지를 15분 동안 읽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용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좋았다.


잃어버린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린아이가 되어 모든 걸 새로 배워야 했다. 가족들과 함께 사는 법, 10분 넘게 산책하는 법, 책 읽는 법, 공부하는 법, 인생을 즐기는 법.


나는 이 모든 과정을 거치는 내내 행복했다.


그리하여 작년에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마치고 한국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수시를 준비했었다.


국제학과를 전공할 생각이었다. 속으로 나는 이것 또한 내가 원하는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모두 떨어졌다. 행복했다. 학벌주의로 똘똘 뭉쳐진 환경 속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학에 모두 떨어진 덕분에 나는 더 진취적인 사람이 되었다. 이제 내가 무엇을 해도 간섭할 사람이 없었다.


드. 디. 어 얼룩덜룩한 도화지가 아닌 새 도화지 같은

인생이 올해 시작되었다.


앞으로의 나는 어떻게 살고픈가?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작가가 꿈이었다.


또한 유목민 같이 살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공부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때 머릿속에서 사이버대학이 생각났다. 내가 원하는 인생에 완벽히 부합하는 선택이었다.


이제 문예창작을 배우기 위해 원서도 접수했겠다, 어디에 가서 살면 좋을까?


어린 시절의 로망이 생각났다. 나는 한국도 프랑스도 아닌 제3국에서 살고자 했다. 만약 될 수 있다면 동양의 문화와 서양의 문화가 적절히 섞인 나라였으면 했다.


일본을 골랐다. 현재 나는 일본에 가서 살기 위해 워킹 홀리데이를 준비 중이다.


만약 인생이 무너지는 중이라면 기뻐해라. 마침내 내가 원하는 것들이 모습을 드러낼 준비가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니.


내가 찢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얼룩덜룩해진 도화지가 찢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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