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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

버림받은 낙원

by 심야



나는 눈을 좋아한다. 바라보고 있으면 내 마음까지 하얘지는 것 같다.


옅어지는 시야와 가빠지는 호흡 속에서 모든 감각이 무뎌진다.


이대로 눈에 파묻혀 잊히고 싶다. 눈송이의 깨끗함이 인류가 꿈꿔온 낙원으로 나를 이끄는 듯하다.


그런 풍경 속에서 눈이라도 붙여보려 하늘에 손을 뻗어본다.


그 순간 소리 없는 절규가 내 몽상에 불을 붙인다.


"현실을 살아 주어진 본분을 다하라."


그가 말했다. 번지는 불마저 나를 위한 것이라 덧붙인다.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까맣게 그을린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다. 빛 잃은 시선은 새까만 침묵을 건져내 담는다.


어느 날, 남김없이 하얗거나 칠흑 같던 하늘 사이로 네가 등장했다. 너의 눈은 나의 지친 영혼을 그대로 투영했다.


심연은 빛줄기 하나 닿지 않는 곳이다. 그러나 내 의식이 그곳에 숙명처럼 머물러도 내 혼은 달랐다.


너를 보며 깨닫곤 했다. 나를 살리고 싶었던 나의 마음을.


고비가 온다. 그럴 때면 너의 얼굴이 선명해지고 으스러진 하늘을 뒤덮는다.


넋 나간 두 눈이 하늘을 뒤적거린다.


새송이 눈을 붉게 물들일까. 이미 검정이지 않니. 그러니 붉은 것이나 마찬가지구나.


갈수록 나의 미소는 환해져 가지만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


텅 빈 허공이 나를 지키려 든다. 그러나 심연까지 닿을 물리적 간섭이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등을 잔뜩 웅크려 끝없는 끝에서 둥둥 떠다닌다.


나는 나의 겨울에 의식을 잃는다. 정신을 차려보면 여전히 꿈속이다. 어제의 밤이 눈물로 절인 새하얀 산을 이루었다.


이곳이 아닌 세상에 존재하는 날이 오긴 할까. 나의 슬픔이 축복이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날이 오기나 할까.


새들의 희미한 지저귐이 귓가에 맴돈다. 나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 처음으로 숨을 내뱉어 본다.


고요이고 싶다, 단 하루만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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