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성이 울리면 증발하는 결심들
나는 20년 차 러너다. 평소에는 훈련을 피할 핑계를 찾는 데 능숙하다. 습도가 높아서, 바람이 거세서, 혹은 내 체질이 원래 무거워서. 하지만 대회라는 무대는 비겁한 핑계들을 단숨에 걷어치우게 만든다.
출발 선상에서 수없이 되뇌었던 "천천히"라는 다짐은 총성과 함께 증발한다. 나는 또다시 무모하게 달려 나간다.
후회는 늘 같은 자리에서 나를 기다린다
25km 지점을 지나자 훈련 부족이라는 성적표가 도착했다.
30km 이상의 장거리를 견뎌보지 못한 근육들이 아우성을 쳤다. 구간 기록이나 페이스 조절 같은 세련된 단어는 이미 버린 지 오래다.
35km 지점에 도달했을 때, 늘 그렇듯 전반부의 만용을 반성하며 후회했다. "왜 또 그랬을까." 하지만 이 후회는 마라톤이 나에게 주는 가장 정직한 거울이기도 하다.
러너가 러너를 구원하는 순간
완주 후 골인지점에 들어서며 느낀 것은 해방감보다 감사함이었다.
가장 힘들었던 35km 지점에서 나를 일으킨 건 나의 의지가 아니라 타인의 헌신이었다. 이미 완주를 마친 동료들이 땀을 닦기도 전에 다시 주로로 거슬러 올라와 모르는 이들에게 콜라와 바나나를 건네고 있었다.
그들은 단순히 간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달리는 마음'을 나눠주고 있었다.
4시간 42분이라는 기록은 비록 느릴지언정, 그 속에는 타인의 친절에 숙연해지는 시간과 나 또한 누군가에게 기여하고 싶다는 새로운 다짐이 담겨 있다.
2026년의 서울 마라톤은 그렇게 나에게 기록보다 더 큰 감동을 가르쳐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