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바뀌는 순간, 나는 어머니를 떠올린다

숫자를 다루던 사람이 시를 쓰기까지

by 인생클래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던 옛 동료가

등단 20년 만에 시집을 냈다.


금융이라는 숫자의 세계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 사람이

이제는 ‘언어’로 삶을 건네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낯설면서도 오래 마음에 남는다.


『황금 들녘』을 펼치며

나는 자연스럽게 한 편의 시 앞에 멈췄다.


“첫서리가 내렸다

… 오늘 아침은 칼날 선 첫추위다”


차가운 문장인데

이상하게 따뜻한 기억이 따라온다.


어린 시절,

손을 호호 불며 고드름을 만지던 순간과

군불을 지피던 방 안의 온기,

그리고 그 안에 있던 어머니의 손길.


이 시집은 이렇게

계절의 시작을 통해 기억을 불러낸다.


풍경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풍경에 묻어 있는 ‘시간’을 꺼내 보여준다.


이 시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사물을 오래 바라보는 태도다.


“아지랑이는 칼날일까

굳게 닫힌 창이 반으로 절개된다”


봄은 따뜻한 계절이 아니라

무언가를 뚫고 나오는 힘으로 그려진다.


시각과 촉각이 동시에 살아 움직이며

독자의 감각을 건드린다.


또한 시인은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든다.


다듬이질 소리를

“각진 연주”라 표현하고,

봄을

“호랑나비 등에 실려 오는 화신(花信)”이라 부르는 순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던 장면을

처음 보는 것처럼 다시 보게 된다.


[해 질 녘], [하치장] 같은 시에서는

하루의 끝과 주변부의 공간을 통해

삶을 돌아보게 한다.


이 시집 전체를 흐르는 정서는

요란하지 않다.

대신 조용히,

그러나 오래 남는다.


어쩌면 이 시집이 깊게 다가오는 이유는

시인의 삶 때문일지도 모른다.


금융기관에서의 긴 시간,

그리고 호스피스 병동에서의 봉사.

삶과 죽음을 가까이에서 바라본 사람의 시선은

아름다움뿐 아니라

시간이 남긴 상처까지 함께 담아낸다.


『황금 들녘』은

화려한 시집이 아니다.


하지만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여백이

독자의 마음에 오래 머문다.


소란스러운 하루 속에서

잠시 멈춰 서고 싶을 때,

이 시집은

조용히 옆에 앉아

기억을 함께 꺼내보자고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