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곳은 충남 연기군 전의면 고등리 삼기마을,
시거리라 불리던 작은 마을이다.
고려산 자락 깊숙한 분지에 자리 잡은 산골, 세상의 소음과는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곳에는 지금은 폐교가 된 삼기국민학교가 있었고,
입구에는 동네에서 가장 번듯한 건물, 방앗간이 있었다.
발동기가 웅웅거리며 돌아가고,
피댓줄을 따라 바퀴들이 숨 가쁘게 움직이는 광경은 어린 나에게 늘 놀라움이었다.
볏가마니가 들어가면 눈부신 햅쌀이 쏟아져 나오고,
방앗간 안은 달콤하고 고소한 향기로 가득 찼다.
뒤편에서는 왕겨가 노란 눈처럼 흩날리며 쌓였는데,
그 장면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다.
'시골은 정이 많다'고 흔히들 말한다.
하지만 내가 자란 마을은 그 말과는 조금 달랐다.
선후배가 서로를 세워주고, 이웃끼리 품앗이하며 살아가는 모습보다는
이웃간 다툼과 각박함이 더 익숙했다.
물론 명절마다 함께 모여 척사대회를 열고,
꽃길을 가꾸며 웃던 순간들도 있었다.
절미운동을 하며 쌀을 아껴 모으던 기억도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따뜻한 정이 넘쳐나는 공동체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다른 지역 친구들이
"우리 동네 선배들이 도시로 나갈 때 후배 손을 잡아줬다"는
이야기를 할 때면, 부러움과 씁쓸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아버지는 아홉 살 무렵,
충남 서산에서 홀로 연기로 보내졌다.
어린 나이에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며 청년기를 보냈고,
결혼 후에도 가난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쌀 두 짝을 빌려줬다가 끝내 돌려받지 못한 일, 친정아버지나 형제에게
쌀을 내주고 한을 남긴 이야기들은 지금도 어머니의 가슴 속에 응어리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땅 한 평 없이 시작해 결국 작은 밭과 논을 일구어내셨다.
없는 살림에도 자식들을 키워낸 그 세월은 지금 돌이켜보면 기적과도 같다.
세월이 흐르며 마을은 도로가 뚫리고,
공단이 들어서면서 하나둘 수용되었다.
주민들은 보상 문제로 갈등을 빚었고, 형제끼리 법정에서 다투는 모습까지 보게 되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고향이 더 이상 따뜻한 울타리가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일까. 고향이 사라진다 해도 크게 아쉽지는 않다.
내 기억 속 고향은 남들처럼 초록빛, 보랏빛으로 빛나지 않는다. 회색빛이 더 짙다.
그러나 그 말 속엔 아마도, 지우지 못한 애착과 후회가 섞여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서로를 북돋우고 격려하는 문화를 배우진 못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도 우리 마을 출신 사람들은 다른 고향 친구들처럼 화합하지 못했고,
사회에서도 큰 성취를 거둔 이가 드물다.
그럼에도 고향은 여전히 나의 뿌리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단한 삶, 방앗간에서 맡았던 햅쌀 향기,
아침 햇살에 반짝이던 미루나무 잎사귀들….
그 모든 기억이 모여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다.
마을은 사라져도, 내 마음속 고향은 지워지지 않는다.
다만 나는 바란다. 새로운 마을에서만큼은 서로를 조금 더 아끼고,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따뜻한 문화가 이어지기를.
그것이 내가 회색빛 고향에서 배운, 마지막이자 가장 소중한 교훈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