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차별하지 않는다
잃어버린 기억에 관한 짧은 소회: 문장의 속도가 기억을 따라잡을 때
어떤 책이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하물며 이제는 제목도 가물거린다. 그 내용도.
분명히 읽을 때는 이렇게 재미있는 책 다 읽어가니까 아깝다는 생각도 했는데 말이다.
잊히는 것이 아까운 듯 아내가 다급한 목소리로 독촉한다.
"얼른 생각해 봐, 잊어버리기 전에"
줄거리도 제목조차도 안개에 가린 듯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별생각 없이 한마디 툭 던졌다.
"기억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오~ 제목 좋다."
아내가 컴퓨터 앞에 나를 끌어다 앉힌다.
글감은 언제나 오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신내림 같은 것이라고.
그러니, 말씀이 왔을 때 얼른 붙잡아야 한다고. 아내가 재촉한다.
가끔씩 내가 던지는 두서없는 말을 아내가 곱게 받아 주는 순간,
그 아름다운 느낌은 차별 없이 그대로 글로 빚어진다.
내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것들이 내 손을 통해 쏟아져 나온다.
하늘의 수많은 별이 하나 둘 엮여 별자리가 만들어지듯,
내게서 뛰쳐나온 기억의 편린이 별처럼 그 무수한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내가 아니라 내 손이, 나도 모르게 기억된 실타래를 풀어나간다.
내가 나에게 전하는 이야기, 나는 무심의 마음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듯
한 줄 한 줄 엮어나간다. 어쩌다 기억이 헝클어질 때면 그 마음속 기억을 다시 풀어나간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생겨난 생채기들, 모두 나의 것으로 묵묵히 보듬어 안는다.
잊혔다가 떠오르는 생각들, 알알이 염주에 달아, 한 알 한 알의 구슬을
엄지로 되새기듯 무한의 회전을 달빛에 실어 보낸다.
그 순간 잃어버린 기억이 본래의 이야기를 되찾기라도 한 것처럼,
회전의 중력으로 다시 한 글자 한 글자 내 마음에 새겨지고 있다.
그렇게 마음에 담긴 기억들, 무한한 꿈을 이어가며
잊힌 짤막한 이야기를 조용히 내게 들려주고 있다.
잃어버린 기억이 순간순간 되살아나며 기억이란 놈의 귓불을 잡아당긴다.
다시 한번 잊을 수 없는 수많은 귓속말 끊임없는 되새김을 시작한다.
망각의 무차별적 공격이 아무리 심해도,
기억의 상실이 아무리 빠르다 해도,
문장의 속도가 상실되는 기억을 앞지를 때가 있다.
그럴 때 기억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치매라고 으레 그럴 것이다 넘겨짚지 않는다.
내가 글을 쓰는 동안 시간을 두고 기다려 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