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지만 시외우기

은비가나당당이당

by 수필천편

요즘 한 편의 시를 외우고 있다.

공광규 시인을 초대하는 시토크에서 시인의 시 한 편을 선택해 낭송해야 한다.

시간은 빠듯하고 머리에 집어넣는 것은 더뎌서 그냥 보고 낭독하려고 했다.


아내는 시가 짧으니 한 번 외워 보라며, 밤낮으로 독려했다.

그래서 시작했다. 하지만 도저히 외워지지 않았다.


첫 글자를 하나씩 따서 외워 보았다.


은. 비. 가./ 나. 당. 당./ 이. 당.



별 닦는 나무 / 공광규


은행나무를 별 닦는 나무라고 부르면 안 되나


비와 바람과 햇빛을 쥐고 열심히 별을 닦던 나무


가을이 되면 별가루가 묻어 순금빛 나무


나도 별 닦는 나무가 되고 싶은데


당신이라는 별을 열심히 닦다가 순금물이 들어


당신에게 아름답게 지고 싶은데


이런 나를 별 닦는 나무라고 불러주면 안 되나


당신이라는 별에 아름답게 지고 싶은 나를



그렇게 안 외워지더니

방법이 통했는지 거짓말처럼 어느 순간 외워졌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더니,

암기는 언제나 요령이 필요하다.


아무리 치매라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해도 해도 너무한다고, 급기야 왜 사냐고

막말까지 쏘아붙이던 아내는

정작, 두 줄도 못 외우고 흥미를 잃었다.


조금 더듬거리긴 했지만 마지막 시행을 다 외우니

확실히 좋아지고 있다며, 언제 그랬냐는 듯

네로처럼 엄지 척 올려준다.


시 한 편에 죽고 사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다.

하마터면 못 외우고 죽을 뻔했다.


월, 목,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