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지만 충만하게

잘 보내는 어느 하루

by 수필천편

버스도 잘 타고, 기타 수업도 잘 마치고,

오늘 배운 등대지기를 부르며 집으로 온다.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 위에 차고? 자고? 지고?"


집에 오니 아내가 따끈하게 샤브샤브를 차려 놓았다.

늘 내가 나갔다가 오자마자 먹을 수 있게 준비해 두는 아내다.


점심을 먹고 꼼꼼하게 양치를 하고 더 꼼꼼하게 설거지를 마친다.

브런치를 열고 좋아하는 작가님들의 글을 읽고, 댓글을 쓴다.


해가 가장 따뜻할 때, 맨발 걷기를 하러 산으로 간다.

천자문을 외우고 시를 외우고 눈운동을 하며 걷는다.


집에 와 '발을씻자'를 골고루 뿌려가며 발을 씻는다.

아내가 준비한 삶은 달걀과 닭가슴살 버터구이를 먹는다.

근력운동을 위해 헬스장에 간다.


집에 오면 아내가 또 연어와 삼겹살을 구워 놓는다.

나는 치매라서 식단은 늘 케톤식이라고 아내가 말해준다.


저녁시간도 이것저것 할 것은 늘 많지만 다 못한다.

일기를 쓰고, 소리 내서 책을 읽고 책 다 읽으면 감상문을 쓴다.


브런치에 이런저런 글도 쓰고, 댓글도 달고, 좋아요도 누른다.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가는 하루가 가장 잘된 하루다.


길도 잊어버리지 않고,

가방도 옷도 신발도 시계도 핸드폰도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는 날,

아내가 혼자 살고 싶다고 절규하지 않는 날,

귀하고 드문 날이다.


아내를 식겁하게 하지 않고, 출동하게 하지 않고,

가슴 철렁 내려앉게 하지 않는 그런 날.

치매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린 충만한 어느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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