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시의 다이어리, 엘런 델랑어가 글. 일라리아 차넬라토가 그림-
문진을 좋아하고 잘 이용한다. 책을 읽다가 잠시 다른 일을 할 때 문진은 책갈피보다 무엇인가 조금 더 고급스러워 보인다. 주로 투명 반구의 문진을 사용하는 데, 그 안에 그림이 들어있는 것도 사용하고 그냥 그 자체로 반짝이는 것도 이용한다. 어릴 적에 다락방에서 많은 책들과 함께 반짝이는 반구형의 문진을 보았다. 나는 용도를 모르는 그 물건에 조금은 집착했었다. 마치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말이다. 나이도 들고 책도 읽고 문구용품들에 관심이 있을때쯤 내 어린 시절의 소중한 물건이 바로 문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물건을 통해서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다시 만난듯하여 한동안 들떴음을 고백한다. 그것을 사용했던 분과 내가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기도 마찬가지다. 어린 시절 일기를 발견하면 다시 그 시절의 감각과 기억을 만난다. 안 좋았던 기억은 안 좋았던 대로, 좋았던 기억은 감사로 다가온다.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듯 일기는 우리의 상처를 회복하게 하는 기능이 있다, 요즘 많이 쓰는 감사일기도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좋은 수단이다. 엘런 델랑어가 쓰고 일라리아 차넬라토가 그린 ‘리시의 다이어리’에서 할머니도 그런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다이어리를 매개로 할머니와 리시는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또한 일기는 리시의 할머니의 어린시절과 현재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좋은 매개체가 되었을 것이다.
어느날 리시는 할머니의 생일선물로 꽃과 일기장을 사 가지고 간다.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꽃에 리시와 할머니는 기쁨을 느낀다. 리시는 할머니에게 일기가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다. 할머니는 오래전의 일기를 버리지 않고 간직해 놓았다. 그래서 리시에게 몇 부분을 읽어주었다. 좋았던 일, 비록 좋지 않지만 그것때문에 많은 것을 깨달았던 일등을 읽어주고 리시는 일기에 대해 알게 된다. 다음날 할머니는 리시에게 새 일기장을 사준다. 그 날부터 리시는 새 일기를 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리시의 둘도 없는 보물이 될 것이다. 마음의 키를 훌쩍 크게 만들 것이다.
자신을 쓰는 것에는 힘이 있다. 화난일, 안타까운 일, 기쁜 일등을 차분히 일기에 써 내려 가면서 리시는 조금은 더 객관적으로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과 세상을 만날 때에도 도움이 되어 실족하는 일을 줄일것이다.
내가 결혼을 하고 예전에 살던 친정집에 가니 내 일기장이 수 십권 다락방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것을 잠깐 들여다보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당시에 그렇게 삶에 고통을 받았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번에 집에 갔을 때 어머니는 내게 일기를 다 가져가라고 하셨다. 일기장이 일부 훼손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그렇게 힘들 때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나보다. 내게 위로를 하지 않고 그냥 그 시절을 찢고 싶었나보다. 집으로 가져와 재활용장에 버렸다. 안타깝지도 시원하지도 않았다. 지금 같았으면 가져와서 누추하고 비루한 일들이었지만 사랑하고 어루만져 주었을텐데, 나의 어떤 시절들이 충분히 위로받지 못하고 훼손괸 느낌이다.
이제 나는 일기를 쓰지 않는다라고 쓰려다가 여기에 쓰는 이 글들이 나의 일기라는 생각을 해본다. 리시처럼 나도 매일 아침 새롭게 비어있는 A4를 만나고 일기를 쓴다. 그리고 이제 나는 예전의 아픈 내가 아닌 기쁨과 사랑으로 가득찬 사람이다. 그런 일기를 매일 쓸 것이다. 일기를 쓰다가 숨을 한번 들이키고 문진을 놓고 싶은 자리는 어디일까?
이 글에 이미지는 - '리시의 다이어리', 엘런 델랑어가 글. 일라리아 차넬라토가 그림-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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