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흐린 날의 개나리
-스테들러 사의 고체 형광펜 -
1) 흐린 날의 개나리
-스테들러 사의 고체 형광펜-
날마다 금강가를 걷던 날들이 있었다. 자전거도로의 한 편으로 매일 5km 정도씩 걸었다. 빠르게 걷다 보면 얼굴은 땀으로 뒤범벅이 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챙이 넓은 모자 안에 숨은 몸은 오히려 희열을 느끼곤 했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금강의 풍경은 뒤틀린 관계에서 오는 고통을 상쇄시켜주고, 상실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걷기가 애도의 한 과정이 되었던 날들이었다.
고백하자면 폭풍과도 같았던 모든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텍스트의 힘이었다. 문학이나 예술작품은 내게 절대적인 기쁨을 주었다. 읽고 쓰는 과정에서 우리는 성장을 한다. 읽은 텍스트에 기대어 자신의 이야기를 어딘가에 ‘발설’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성장해 나간다. 그와 같은 고백이 스스로의 마음의 키를 키우고 몸집을 불릴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발설’ 이후에는 훨씬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물론 이후에 금방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또다시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고 하는 과정을 거쳐서 끝내는 성장하는 것이다.
조금은 흐린 어떤 날이었다. 아마도 2월에서 3월로 들어가는 날 중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다른 날보다 조금 더 오랫동안 걸었다. 새롭게 시작하는 학기와 강의하는 과목에 대한 생각을 아마도 꽤 했을 것이다. 그 시기면 내게는 늘 떠오르던 서울의 한 대형 문구점에 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나는 제법 오랫동안 그곳에서 새 학기 준비를 했다. 어느 학기인가 그곳에서 단정한 노트와 스테들러 사의 고체 형광펜을 색깔별로 여러 자루 샀다.
12,000보 정도를 걸은 후, 집에 들어와 식탁에 앉아 그림책을 읽으며 따뜻한 대추차를 마셨다. 이상하게도 책을 덮자마자 잠이 쏟아졌다. 그대로 침대로 들어가서 깊은 잠을 잤다. 숙면을 취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추차에 들어있는 마그네슘 성분 때문일 수도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 그저 흐린 날씨 때문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아무 이유가 없었을 수도 있다. 꿈을 꾸었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꿈이었다. 자기 전에 읽은 그림책의 내용과 학기 전에 늘 가곤 했던 대형 문구점의 이야기가 변형되고 압축되어서 나타난 꿈이었다. 꿈속의 나는 문구점에 들러서 독일의 스테들러 사의 형광색 연필 한 자루를 골랐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꿈에서 깨어난 후 나는 어떤 영화에서와는 달리 울지 않았다. 너무나 완벽한 수면이었다. ‘우리는 매일 새롭게 태어나서 어제(아니면 자기 전)의 했었던 일들을 그저 계속하는 것이구나. 그것이 인생이구나.’하는 다소 생뚱맞지만 좋은 깨달음도 얻게 되었다고 잠시 즐거워했다. 그리고 다시 그림책을 펼쳤다. 책에서 나온 한 구절을 나는 노트에 그대로 옮겨 적었다.
"태어난 아이는 물고기를 보면 잡으러 가고 모기한테 물리면 가려워했습니다. 바람이 불면 깔깔깔 웃었습니다."
책상 서랍에서 오래전부터 사용하던 그 형광펜을 찾아 꺼냈다. 노트에 옮겨 적은 기쁨의 문장 위에 그 펜으로 밑줄을 그었다. 그리고 천천히 소리 내어 문장을 읽어보았다.
오래전, 아주 흐린 봄날 담벼락에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그때 누군가 이야기했다.
“아! 개나리는 역시 흐린 날이 제격이야. 밝은 날의 개나리는 너무 주책맞아 보이거든.”
나는 고개를 돌려 그 풍경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었다.
다시 밑줄을 그은 책을 내려다보았다. 밝은 개나리 색의 형광펜 아래의 기쁨의 문장이 내게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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