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가방

-일상을 나누기-

by junetree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지 벌써 삼 년이 더 지났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제게도 아버지는 살아오는 시간 동안 나의 정체성이셨습니다. 평소에 식사도 잘하시고 건강하셨던 아버지가 병원에 가시자마자 의식을 잃고 그렇게 갑자기 가실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믿을 수 없는 갑작스런 헤어짐에 충격을 받은 저는 지난 몇년을 무척이나 힘겹게 보냈습니다. 외출을 할 수도 없었던 저는 거실 창 앞에 서서 밖의 풍경만 바라보았습니다. 당시 몹시 추운 날들이 지속되었었는데, 창밖으로는 꽁꽁 언 겨울의 풍경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 나날들을 보내다가 어느 날 모든 것이 얼어붙어 있지만 햇볕만은 따듯하게 비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일생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살아계실 적에 아버지는 많은 이들과 소통이 어려우셨습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더 그러셨습니다. 보청기를 해드리기도 했지만 그것을 몹시 불편해하셔서 그냥 빼고 지내셨습니다. 그러한 노년의 아버지에게 유일한 즐거움은 집 근처의 도서관에 가셔서 책을 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방에는 ‘논어’나 ‘중용’ 등의 책들이 책꽂이에 꽂혀있었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시는 아버지가 다행스러웠습니다. 바람 같은 젊은 시절을 지내신 분이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마음속으로 아버지의 노년의 삶을 응원하기도 했었습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에 많은 일을 하셨지만 원하는 바를 성취하시지는 못하셨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가족들과의 갈등도 많았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나와서 많은 일들을 겪은 이후에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사랑했습니다. 노년의 아버지의 일상은 아침 일찍 도서관에 가셔서 열람실에서 책을 읽으시고 점심식사를 하시러 집으로 오셨다가 다시 도서관으로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도서관에서 대출해 오신 책은 집에서도 읽으셨습니다. 언젠가는 커다란 가방을 구입하시고 즐거워하시면서 “얘, 이 가방 어떠냐?”라고 내게 물으셨습니다. 아마도 도서관에서 책을 대여해서 가져오는 가방으로 사시려고 구입하신 것 같았습니다. “네. 괜찮네요.”라고 대답하면서도 다소 여자 가방 같았기에 의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그 커다란 가방 속에는 늘 도서관에서 대출해 오신 책으로 가득했습니다.

언젠가는 친정에 들렀다가 아버지가 자주 다니시는 도서관 열람실에서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열람실의 넓은 책상에 책을 펼쳐놓으시고 아버지가 앉으셔서 책을 읽으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조용히 아버지 앞에 앉았지만 귀가 어두우신 아버지는 잘 모르셨습니다. 결국 제가 가서 아는 척을 한 후에 저를 보실 수 있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버지와 한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었습니다. 한창 여름이어서 밖에는 녹음이 우거지고 매미소리가 유난이 크게 들렸습니다. 아버지는 도서관에서의 독서를 통해 젊은 날의 상처를 치유하고 노년의 삶을 지내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면서 그 커다란 가방은 제가 가져왔습니다. 가방은 아버지가 주신 마지막 선물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평생 추구하셨던 가치와 함께 아버지의 유산이 되었습니다. 일단은 그 가방을 아버지와 하셨던 것처럼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올 때 사용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사용하면서 아버지와 함께 했던 추억들을 꺼내보기도 하고 내게 주신 가치들을 넣기도 할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그 겨울 의아하게 비췄던 햇살들이 옳았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유산과 함께 새롭게 살아갈 생각입니다. 또한 내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과 더불어서 아버지와 같이 힘들게 사셨던 분들을 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한 발 더 노력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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